125. 벽신문
1924년 여름께 국내 처음으로 벽신문이란 것이 나왔다.
그때도 ‘벽신문’이란 것은 듣지도 보지도 못한 괴상한 것이라 하여 화제가 되었으며 이것이 신문에 예보도(豫報道)되자 보도 기관이 희소한 관계로 그랬던가 몇몇 지방에서는 지국 설치 희망자로부터 규약과 보증금 액수 그리고 부수에 대한 할부 관계 무가지 매수를 문의하는 우편물이 쇄도하여 쓴웃음을 머금게 했다.
여기에 벽신문에 관한 취지와 유래를 약설(略說)해 보면 이것을 Sten gajeta~Stennya gazeta라 칭하며
멀리 제정 러시아 때부터 적색소비에트 또는 프랑스 등의 적위군(赤衛軍)의 대내(隊內)에서 유행하여 이것이 점차로 각 공장과 공청(公廳) 노동자 구락부, 농촌 독서실 그리고 학교 등에 보급된 신문 형식이었는데 주로 일반 신문에 게재되지 않는 소범위의 사회사상의 보도 기관이라는 것이다.(일본 중앙공론사 발행 문예대사전 참조)
전술한 바와 같이 이것은 반드시 적위대에서만의 벽신문이 아니고 각 공장에서도 노동자들만의 이해관계와 각종 물가 시세를 보도하는 곳도 상당수가 있었던 모양이었으나,
마산의 경우는 노동자의 현황뿐만 아니라 신문에 게재된 중에서 돌출한 사건도 보도한 것이다.
외국의 일은 잘 모르나 여기서는 백로지(白鷺紙) 전지 한 장에 수서(手書)하여 매주 2회 토, 일요일 양일 밤에 노동자 혹은 여성들 앞에서 즉독(卽讀)하고 설명을 한 다음에 질의 답변 등을 하여 상당한 호평을 받았다.
그러나 여기에 교대로 논설을 담당한 두 사람 중 계급투쟁과 생산 경쟁을 주장한 김명규와 유물사관을 극히 반대하며 상호부조론을 신봉한 김형윤과는 그 사상과 생리가 완전 대립된 상황 속에서도 이들의 감정과 성격은 어느 점에선가 일맥 통하는 점도 없지 않았으나 김명규 등은 공산당 사건에 대거 연좌됨으로써 사무실도 폐쇄되고 7호가 마지막이 되고 말았다.
* 주 ; 사무실은 현 중앙병원 자리의 조선일보 지국임. <<<
본 사진은 중앙일보 2016년 3월 8일자에 실린 것으로, 동일본 대지진 때 이시노마키일일신문의 취재부장이던 다케우치 히로유키 상무가 2016년 3월 4일 신문사의 박물관에 전시된 수기 벽신문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장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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