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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군군의학교2

월영동 뒷산 ‘군용지’ 표석 이 글은 4월 29일 경남도민일보에 게재된 원고입니다. ‘軍用地’(군용지)라고 뚜렷이 음각된 표석, 그것은 일본의 지배 흔적이었다. 수십 년 식민의 흔적이 어디 한두 군데 일까마는 그것은 너무도 강력한 증표였다. 지인들과 봄바람을 쐬러 올랐던 마산 월영동 뒷산 능선이었다. 그날만 두어 개 보았으니 마음먹고 나서면 더 있을 터였다. 오래 전에 이 능선에서 ‘迫間所有地’(박간소유지)라고 새겨진 표석을 보기도 했다. 박간은 강점기 부산의 갑부다. 사유지의 표석은 일본인이 많이 살았던 도시라 마산 일대에 더러 서있다. 하지만 ‘군용지’ 표석은 사유지와 무게감이 크게 다르다. 위치로 보아 그곳에 박힌 이유는 알만했다. 강점기 마산에 소재했던 일본군 중포병대대 바로 뒷산 능선이었다. 누구도 진입하지 못하.. 2024. 5. 1.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35) - 개항이후 일본 신사(神社)가 우리 민족을 정신적으로 위압했다면, 물리력으로 우리를 억누른 것은 일본의 군대와 경찰이었습니다. 일본군대의 마산진출은 1905년 마산선 철도가 건설될 때 쯤 시작되었습니다. 하지만 본격적인 진출은 1909년 7월 일본육군의 중포병대대(重砲兵大隊)가 진해에서 마산 월영동(현 월영동아파트단지)로 이전한 것과 같은 해 12월 대구헌병분유소(大邱憲兵分遺所)을 신마산에 설립한 일입니다. 이 글은 월영동에 주둔했던 「육군중포병대대」에 대한 내용입니다. 러시아와의 각축기에 일제는 율구미와 자복포 일대(현, 월영동 아파트 단지 및 구 한국철강 부근 일대)를 그들의 전관거류지로 확정했다가 1905년 러일전쟁이 끝나고 을사조약이 체결될 즈음 이 지역은 군용지로 바뀌었습니다. 그러다가 1908년부터 본격.. 2010. 12.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