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 야까이 도가(都家) 일인 어조(漁組)
신마산에는 일본인들의 조차한 곳이라 해서 대개 한인들은 신마산을 거류지 아니면 조계(租界)라고 하는데, 이곳이 일인들의 생활 중추지점이다.
<1920년대 신마산 일본인 거리인 경정(京町, 쿄마치>
모든 생활필수품은 꼭 필요한 것 외에는 신마산 일인들끼리의 상거래로서 자족한 것이며, 지금 외교구락부라는 다실 근처에 ‘아케트(염매시장 廉賣市場)’를 설치하여 그들끼리의 편리를 꾀하였으며, 신마산 발전소 근방 일대를 매립하기 전까지는 일인들의 생선 도매상이 있었다.
이 일본인 생선 도매상 즉 수산조합에는 부득이한 사정이 아니면 한인 어민들을 ‘세리’에 가지 않고 대부분 구마산 어판장 위탁으로 하고, 이 때문에 일본 어상(漁商)들은 어로 현장에서 직접 매매 계약을 하는 식 밖에는 없었다.
그들은 가장 근거리의 밤꾸미(栗九味) 어장이 단골인 것이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이들 어판장을 어떻게 된 일인지 한인들은 야까이 도가라고 하였다.
대체로 야까이 도가란 어느 나라 말인가?
한어(韓語)는 물론 아니요, 중국 말이나 한문어도 아니며 또 일본말도 아니다. 그래서 일본 속어와 일본의 언어 사전에서 그런 비슷한 말을 들추어 보아도 찾을 길이 없다.
필경 ‘야까이’란 말은 입하된 선어(鮮魚)를 ‘세리’할 때 경매인이 쉬지 않고 떠들어대는 말이 ‘야가지(也賈之, 韓語로 사라는 뜻)’인데 일어를 모르는 한인들은 ‘야가지’를 ‘야까이’로 잘못 알아듣고 ‘야까이’한 것으로 된다.
이 야까이 도가도 1940년 경(추측) 현재 매립 후의 구마산 어조(漁組)와 합작하여 자연 해산이 되고 그들의 야망도 패전과 함께 사라지고 말았다.
* 특기할 일은 마산상업회의소라는 조직이 있었는데 운영이 괄목하리만큼 활발하여 대한제국 정부에서 장려금조로 금 5백원을 전달한 일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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