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 미궁에 빠진 대금(大金) 도난 사건
1932년(소화7) 1월 8일 조선은행 평양지점에서 재고금(在庫金) 4백50만원 중 78만원(중량 7관貫 96인刃-두 지게)이 하루밤 사이 감쪽같이 없어진 일로,
조선 내는 물론 만주에까지 수사망을 펼치는 일방 길천(吉川) 경찰서장의 직접 지시로 용의자를 시내에서 탐색 중 의외에도 시내 진정(賑町, 유곽촌-대동강 반각도半角島 우측 소재)에서 송지가(松之家)라는 요정의 포주 좌나전심길(左奈田甚吉) 외 5명이 주 공범으로서 수사 인원 130인, 범행 발생 42시간 만에 타진하였다.
현금 소비 만원을 제하고 77만원을 회수한 사건 후로 각 은행마다 가까운 경찰본서와 파출소에 비상 신호기를 비치한 일이 있었다.
평양사건이 발생한 지 23년만인 1955년 3월 21일에 마산시 남성동 소재 저축은행 지점(현 제일은행)에도 22일 개점 즉시,
평시같이 출납에서 지출하려 하자 금고 내에 두었던 천환권, 백환권을 넣은 상자가 파괴되고 재고금 중 3백30만환이 없어진 사고를 알게 되어 행내(行內)는 물론 수사진을 놀라게 한 일로서,
은행 월편(越便)에 있는 남성동 파출소에 수사본부를 두고 범인 색출에 갈팡질팡하다가 용의자로 지목한 변모(卞某) 대리, 안모(安某) 대리를 구속 송검하였다.
그런데 이 두 대리는 평소에 권기상(權璣相) 지점장과 불화하였던 일에 앙심을 품고 수사원에 모략한 것이 밝혀져 무혐의로 석방되고,
지점당국도 이들에 동정하여 본점에 근무케 한 후 지점장으로 승격시킨 일인바 사건 발생 18년이 흘러간 오늘날까지 사건은 영구히 미궁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미궁에 빠져버린 현금 도난사건의 현장이었던 남성동 저축은행(당시 사진, 현 스탠다드 차타드은행 마산지점 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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