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익진의 Q&A ‘이자’ 이야기(1)
이자의 역사
누구든 돈을 빌리면 원금 상환은 물론 일정한 이자 지불까지 해야 한다고 생각하겠죠. 마치 렌터카를 빌리면 차를 원상태로 되돌려주고 사용료 지불도 해야 하는 것처럼 말이죠. 게다가 무엇인가를 빌려준 사람이라면 더더욱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까요? 그런데 이처럼 현대인에겐 너무나 당연해 보이는 것이 인류 역사상 언제 어디서나 그랬던 건 아닌 것 같네요. 그 역사적 사례들은 적지 않습니다.
고대 유대사회에는 희년(주빌리; Jubilee) 제도가 있었습니다. 희년은 일곱 번째 안식년을 말합니다. 49년(혹은 50년)마다 돌아오는 희년이 되면 모든 유대인이 애초에 야훼(유대인의 하나님)가 나누어주었던 신분과 재산 상태를 회복하게 됩니다. 집을 잃은 자는 집을 되찾고, 노예가 된 자는 해방되고, 채무는 전액 면제되었습니다. 그리고 평상시 유대인끼리의 이자 수취는 금지되었지요.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셨을 때 유대사회에는 희년 제도가 사라진 상태였고, 복음이 말하는 하나님의 나라는 바로 희년 제도가 다시 시행되는 나라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고대 그리스의 현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서구 역사상 최초의 경제학자로 간주되기도 합니다. 그는 “말은 새끼를 낳지만 돈은 새끼를 낳지 못 한다” “돈은 교환에 사용하라는 것이지 이자를 받아 더 늘리라고 있는 게 아니다”라며 축재수단으로서의 돈을 부정했습니다. 그는 인간의 삶의 궁극적 목적은 성찰하면서 미덕을 추구하는 것이며, 돈과 재산은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고 갈파했습니다.
상업이나 고리대업은 수단에 불과한 부를 목적으로 삼음으로써 성찰에 필요한 시간을 빼앗고, 타인을 해치는 악덕이므로 자연적 질서에 위배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의 이러한 생각은 역설적으로 당시 그리스 사회가 오늘날의 자본주의 사회와 얼마나 닮은꼴이었는지를 보여줍니다.
이슬람교의 성전 ‘코란’은 이자를 금지합니다. 이자는 위험을 감수하지 않고 얻은 이득이며 성실한 근로를 저해하는 불로소득이기 때문입니다. 이자 금지의 목적은 공평한 소득분배를 실현하고 소수에게 부가 집중을 막기 위해서랍니다. 이슬람의 선지자들은 돈을 빌려주는 것을 자선행위로 간주해 만기에 갚지 못하면 연장해주고, 빈자에게는 일부 또는 전액을 탕감해주라고 권고하며, 이는 부의 분배 원칙인 자카트(경건의 징표로서의 희사(喜事)를 말하며 이슬람교도의 기본의무의 하나)를 실천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 대신 빚의 청산, 즉 원금 상환은 채무자의 종교적 의무이므로 채무자는 빚을 갚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해야 하며, 빚을 진 채 천국에 갈 수는 없다. 빚 갚을 능력이나 재산이 있음에도 빚을 갚지 않는 것은 스스로를 불명예에 빠뜨릴 뿐만 아니라 심판의 날에 벌을 받을 것이라고 가르칩니다.
사진 출처 : https://www.slideserve.com/abiola/l-histoire-de-la-monnaie
돈의 역사
이러한 돈에 관한 이슬람 교리는 지금도 관철되고 있습니다. 오늘날 이슬람 금융에서 은행은 대출을 투자로 변신시킵니다. 예를 들어 이슬람 채권 수쿠크(Sukuk)는 자산의 소유권을 이전한 뒤 이자가 아니라 수익 배당을 받습니다. 프로젝트 파이낸스 시장에서는 이러한 이슬람 금융 방식이 갈수록 널리 활용되고 있다고 합니다.
실물거래만 대상으로 삼으며, 거래에서 발생하는 리스크는 금융기관과 기업이 공유합니다. 금융 계약서에는 이자 대신 리스료(rental fee)나 수수료(commission) 또는 지연배상금(late payment charge)이 사용되고, 대출 원리금 보증이라는 표현 대신 약정손해배상(liquidated damages)이라는 용어가 사용됩니다.
어쨌든 이자라는 용어만 사용하지 않을 뿐 돈을 빌려주고 이득을 취하는 행위 자체는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이처럼 ‘눈 감고 아웅’하는 식이라 할지라도 이슬람 금융이 지닌 실물거래 중심이나 이익과 손실의 분점이라는 정신만은 본받을 만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중세 가톨릭의 교회법은 이자 수취를 공식적으로 금지하고 빈자에게 빌려준 부채의 부분적인 탕감도 권고했습니다. 16세기 셰익스피어의 희곡 <베니스의 상인>에서 고리대금업자 샤일록(Shylock)이 유대인으로 묘사된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로 보입니다. 이자를 통한 경제적 이윤 추구 행위는 비난받긴 했지만 여기서도 이자 자체는 사라진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우회적인 방법으로 추구되었답니다.
예를 들어 대출 만기일을 의도적으로 짧게 책정한 뒤 만기일 이후 이자 대신 위약금을 받는 방법, 다른 통화로 상환하기로 하고는 이자만큼 수익이 발생하도록 환율을 정하는 방법, 저택이나 토지 등 담보물의 사용권을 행사해 수익을 올리는 방법, 외화표시 환어음 할인이나 건식어음(dry exchange, 오늘날의 융통어음) 발행 시 형식상 무이자 대출이지만 이자를 환율에 반영하는 방법, 예금이자 대신 이익 공유 동업 협정을 체결하는 방법, 은행의 실적에 따라 증여금을 지급하는 방법 등이 사용되었다고 합니다. 이토록 많은 방법들 역시 ‘눈 감고 아웅’ 하는 것에 다름없지요.
종교개혁 이후 교회법과 중세사회의 제도들이 무너지고 자본주의가 발전하면서 이자 금지는 거의 사라졌지만, 고리대 폐해를 방지하기 위한 금리 상한제가 도입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독일에서는 1880년, 프랑스에서는 1886년, 영국에서는 1854년에 각각 이자제한 법률이 제정되었습니다. 이는 우리나라에서도 마찬가지였지요.
“백성만이 나라의 근본이고, 먹는 것은 백성이 하늘처럼 여기는 것”(民惟邦本 食爲民天, 민유방본 식위민천)이라고 말씀하신 세종대왕께서는 공사를 불문하고 연 10%를 상회하는 이자를 금지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사창을 설치해 1섬에 연간 3되(3%)의 저리로 곡물을 빌려주는 제도를 시행했는데, 나중에 연 2푼(2%)으로 정착되었답니다. 현대 한국도 이자제한법을 시행하고 있죠. 법정최고금리는 2021년 7월에 24%에서 20%로 인하된 바 있습니다.
이렇게 본다면 인간사회에서 돈의 대차거래는 정말 오래된 경제행위라는 것, 이자는 불로소득이자 불평등 조장 요인으로서 정당한 것이 아니라는 생각에 법이나 교리로 금지되기도 했다는 것, 그러나 이자 수취 행위는 끊임없이 다양한 방법으로 추구되어왔다는 것, 그래서 결국 이자는 정당화되었지만 고리대만큼은 사회악으로 인정되어 지금도 이자제한법이 시행되고 있다는 사실 등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이자의 상한선이 어느 수준이어야 한다는 데는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겠죠. 참고로 경기연구원의 한 보고서는 최고금리의 적정수준은 11.3~15.0%라고 주장한 바 있습니다.
사진 출처 : dotomari.com
서익진의 Q&A ‘이자’ 이야기(2)
이자는 항상 정당한 것일까?
- 이자의 미시경제적 측면
무엇이든 남의 것을 빌려다 쓰면 그것을 되돌려주고 또 그 대가(사용료)를 지불하는 것은 사유재산권 보장이 사회의 기본법의 하나가 된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당연한 일이 되었습니다. 돈 역시 그러합니다. 이렇게 된 데는 누구나 납득할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현대 화폐경제에서 이자의 정당성 관념은 무엇보다 비가역적인 ‘시간’이라는 개념과 긴밀한 관계가 있습니다. 만약 여러분에게 지금 100만 원을 받는 것과 1년 후에 100만 원을 받는 것 중 하나만 선택할 수 있다는 권리가 주어졌다고 칩시다. 이때 ‘1년 후 수령’을 선택하는 사람이 있을까요? 100이면 100명 모두 ‘당장 수령’을 선택할 겁니다. 현재의 100만 원이 1년 후의 100만 원보다 더 큰 가치를 가진다고 생각하기 때문이겠지요. 왜 그렇게 생각할까요?
자신의 돈을 타인에게 빌려준다는 것은 현재의 지출(소비 또는 투자를 위한)을 포기하고 나중에 지출하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대부 기간 동안 물가는 상승하고, 그만큼 돈의 가치는 감소하죠. 따라서 만기에 동액의 원금만 돌려받는다면 대출자는 동 기간 동안의 물가상승률만큼 손실을 보게 됩니다. 손해를 보지 않으려면 원금에다 적어도 물가상승률, 즉 통화가치의 하락률에 상응하는 금액을 추가로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이자입니다.
이로부터 이자율은 최소한 물가상승률보다는 높을 수밖에 없다는 관계를 알 수 있습니다. 물론 대부 기간 동안 물가가 하락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논리적으로는 돈의 가치가 상승한 만큼 돈을 빌려준 사람이 불로이득을 본 셈이 되므로 빌린 사람에게 원금을 깎아줘야 하겠습니다. 그러나 현대의 신용화폐경제에서 물가하락은 거의 예외적으로만 일어나는 현상이기에 이런 경우는 아예 고려의 대상조차 되지 않습니다.
이로부터 파생된 것이 돈의 ‘현재가치’(present value)라는 개념입니다. 현재의 일정액과 미래의 일정액을 수치 그대로 비교하는 것은 경제적으로 무의미합니다. 동액의 돈이라 해도 그것의 현재가치와 미래가치는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현재 100만 원이 갖는 가치는 연 이자율이 10%일 경우 1년 후의 110만 원과 가치가 같다는 것이죠. 역으로 1년 후 110만 원의 현재가치는 100만 원[=110÷(1+0.1)]이라는 겁니다. 이처럼 미래의 일정액은 해당 기간의 이자율(또는 최소한 물가상승률)로 할인해서 환산한 뒤 현재의 일정액과 비교해야 합니다. 인간은 언제나 ‘현재’만을 살고 있거든요. 이때 적용되는 이자율을 ‘할인율’이라고 부르죠.
그리고 혹시 ‘기회비용’(opportunity cost)이라는 개념을 들어보셨나요? 이것은 무엇인가를 선택함으로써 포기해야 했던 다른 선택지(들)가 가져다줄 수 있었던 (가장 큰) ‘이득’을 말합니다. 인간은 같은 시간에 서로 다른 장소에서 두 가지 이상의 일을 할 수 없습니다. 손오공이나 홍길동이 아니라면 말이죠.
예를 들어 봅시다. 갑이 100만 원을 가지고 있고, 지금 예금금리가 연 5%라고 합시다. 이제 갑이 100만 원을 가지고 은행에 예금하기로 선택한다면, 그는 1년 동안 아무 일도 하지 않고도 5만 원의 이자를 벌어들일 수 있죠. 그런데 갑이 이 돈으로 예금을 하지 않고 더 많은 돈을 벌 요량으로 주식투자를 선택했다고 칩시다. 1년 후에 주가가 3% 올랐고, 갑이 주식을 되팔아 3만 원의 이익을 거두었다고 합시다. 이때 수익률은 3%가 되겠죠. 자, 이 경우 갑은 진정 돈을 벌었다고 할 수 있을까요?
예, 3만 원 벌었죠.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만약 갑이 주식투자가 아니라 은행예금을 선택했었더라면 3만 원이 아니라 5만 원을 벌었을 겁니다. 그렇다면 포기한 선택지가 가져다주었을 이익 5만 원을 감안하면 갑은 오히려 2만 원 손해본거죠. “아니, 2만 원 손해 본 것이 아니라 선택을 잘못해 2만 원 적게 번 것”이라고 항변하실 분이 당연히 계실 겁니다. 그럼 이렇게 생각해봅시다.
갑이 자기 돈이 아니라 은행에서 연 5%의 이자로 100만 원을 빌어서 주식투자를 했고, 그 결과 3만 원을 벌었다고 합시다. 이 경우라면 갑은 이자 5만 원이라는 비용을 내야 하니 2만 원 손해 봤다고 판단하시겠지요? 이제 내 돈으로 투자했으니 1푼이라도 이득이 생기면 벌었다고 판단하는 것은 성급한 결론임을 알 수 있죠? 결국 진정으로 경제적인 판단을 할 수 있으려면 특정한 선택지의 이득은 이 선택으로 인해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다른 선택지가 가져다줄 수 있었던 이득(포기한 선택지가 둘 이상이라면 그 중 가장 큰 이득)을 (기회)비용만큼 공제한 뒤 판단해야 한다는 겁니다.
이번에는 갑이 주식투자로 10만 원, 즉 10%의 수익률을 올렸다고 합시다. 이 경우에도 기회비용을 고려하면 갑은 5만 원(=10만원–예금이자 5만원) 밖에 벌지 못했다고 봐야 합니다. 따라서 어떤 투자 선택지의 기대수익률이 은행의 예금이자율보다 낮다면 그 투자안은 실행하지 말아야 하며, 최소한 예금이자율보다 높은 기대수익률을 가진 투자안만 실행해야겠지요. 물론 기대수익률이 실제로 실현된다는 보장도 없지만, 이것은 또 다른 문제이므로 여기서는 논외로 합니다.
각자가 감안해야 하는 기회비용의 크기는 서로 다를 수 있습니다. 수업료가 5만 원인 강의를 듣고 있는 사람들이 각자 포기한 선택지가 무엇인지, 그리고 이것들의 기회비용(포기한 이득)이 얼마인지는 다를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모든 사람에게 공통으로 적용되는 기회비용이 존재합니다. 그것이 바로 은행의 예금이자입니다. 따라서 투자를 구상할 때는 적어도 그 기대수익률이 공통의 기회비용, 즉 예금이자율보다 높다고 판단되는 투자안만 실행하는 것이 경제적으로 합리적인 행위라 할 수 있습니다.
사진 출처 : https://actufinance.fr/
다음, 이자는 돈을 빌린 사람이 그 돈을 사용해 이익을 본다면 이 이익을 올릴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준 대출자에게 보상하는 이익의 일부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대개 사람들은 빌린 돈의 이자보다 더 많은 이익을 올릴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 하에 돈을 빌리죠. 당장 생활비가 부족해 돈을 빌리는 사람의 경우에도 그는 당장은 아닐지라도 미래 언젠가 수익을 올릴 기회를 가질 수 있음을 기대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요?
끝으로, 이자는 채무자의 상환 불이행(디폴트, default)이라는 리스크에 대한 보상이기도 합니다. 돈을 빌려준다는 것은 그 돈을 되돌려 받지 못할 수도 있다는 위험을 감수하는 것이기 때문이죠. 전문 대출기관인 은행은 이 리스크를 철저하게 적용합니다. 차입자의 신용등급에 따라 적용 이자율을 달리 할 뿐만 아니라 특정 수준 이하의 낮은 신용등급을 가진 사람에겐 아예 대출 자체를 거부합니다.
이제 이자의 정당성은 충분히 확인된 것 같습니다. 지금까지의 논의에서 의심할만한 구석이 있나요? 적어도 종교적이 아니라 경제적 차원에서 말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는 좀 더 깊이 숙고해 봐야 합니다. 경제적 차원을 벗어나지 않더라도 우리는 중대한 사실을 놓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게 뭘까요? 잠시 읽기를 멈추고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이자 수취의 정당성이라는 명제는 돈을 빌려주는 사람이 그 돈을 당장 지출할 수 있는 권리를 상실해야 한다는 것, 그래서 이 지출로 벌어들일 수 있었을 이익(또는 만족)을 포기해야 한다는 것을 필요조건으로 전제한다는 사실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자의 정당성은 대출한 금액만큼 대출자의 자산(여기서는 돈)이 감소해야 한다는 사실을 근거로 한다는 겁니다.
이 사실을 인정하신다면, 과연 돈을 빌려주는 사람이나 은행 같은 금융기관이 모두 예외 없이 동일하게 이러한 자산 감소라는 상태에 처하는 것일까라는 의문을 제기해 볼 수 있지 않을까요? 달리 말하자면 자신의 돈(자산)의 감소 없이 돈(자산)을 빌려줄 수 있는 사람이나 기관은 과연 존재하지 않는 걸까요? 만약 존재한다면? 이 경우에도 대출이자의 수취를 정당한 행위로 볼 수 있을까요? 이 질문에 대한 답변도 먼저 스스로 생각해 보시는 게 좋겠습니다.
개인, 기업, 정부 등 비 은행 경제주체는 자신이 보유한 돈의 감소 없이 다른 경제주체에게 돈을 빌려줄 수는 없습니다. 여기에는 예외가 있을 수 없죠. 그렇다면 과연 은행도 그럴까요? 대다수 사람들은, 경제학 교과서가 (엉터리로!) 가르치고 있듯이, 은행은 예금이자를 미끼로 유치한 고객의 예금을 다른 고객에게 대출하며, 대출이자를 예금이자보다 더 많이 받음으로써 수익을 올린다고 알고 있죠. 아닌가요?
이처럼 은행은 자금 중개기관으로서 예대금리차를 주 수입원으로 하는 민간기업으로서 중요한 공공기능을 수행한다는 가르침을 대다수 사람들은 멋도 모르고 사실이라고 믿고 있죠. 만약 이러한 가르침이 참이라면, 즉 은행이 자신의 것이든 고객의 것이든 누군가의 예금을 대출해주는 것이라면, 그래서 누군가의 자산(예금 또는 현금)이 감소한다면, 은행의 대출이자 수취는 정당한 행위라고 판정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앞선 뉴스레터(특히 2호와 3호)를 읽으신 분이라면 은행은 자신의 돈(은행의 자본금)이든 고객의 돈(예금)이든 어느 누구의 돈도 대출하는 데 사용하지 않는다, 은행은 대출 직전까지도 존재하지 않던, 문자 그대로 허공에서 만든 돈을 빌려준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 겁니다. 실제로 은행은 대출할 때 은행 자신의 계좌든 예금자의 계좌든 어느 누구의 계좌에서도 자산(예금)을 감소시키지 않습니다. 의심스러우면 은행직원에게 물어보세요.
그러나 십중팔구 그 직원은 “난 그런 거 몰라요”라고 답할 것입니다. 자세한 것은 뉴스레터 2호와 3호를 다시 한 번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어쨌든 여기서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은행이 존재하지 않는 돈을 만들어 대출하는 것이 진실이라면, 은행의 대출이자 수취를 정당한 행위로 간주할 있을까라는 의문을 제기하는 데 있습니다. 사실 이 진실이야말로 은행의 주인들이 진심으로 감추고 싶어 하는 이른바 ‘은행의 비밀’의 핵심입니다. 그러나 그동안 이 비밀을 아무도 문제 삼아 오지 않았기에 은행에 의한 비밀의 은폐 공작은 적어도 지금까지는 성공적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겠습니다.
요약해보겠습니다. 단순한 증표에 지나지 않는 신용화폐를 사용하는 현대경제에서 돈은 나름의 가치(사용가치 또는 효용)를 지닌 모든 상품을 살 수 있는 힘, 즉 구매력(purchase power)이라는 가치를 가진 자산입니다. 이 돈이라는 자산을 빌려주면서 원금 상환과 이자 지불을 요구하는 것은 정당한 일입니다. 물론 고리대는 문제가 있어 법적으로 상한선이 가해집니다. 그러나 현재의 은행처럼 대출 직전까지도 존재하지 않던 돈을 허공에서 만들어 대출하는 경우에도 이자 수취를 정당한 경제적 요구라고 봐야 하는가라는 의문은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은행이 새 돈을 창조하는 행위를 경제학은 고상하게 ‘신용창조’ 또는 ‘예금창조’라고 지칭합니다. 하나님의 ‘천지창조’에 비견될 만합니다. 새 돈을 창조해 통화량을 늘리는 일이 적어도 경제성장을 위해서는 불가결한 행위라고 한다면, 이러한 통화창조라는 특권과 창조한 돈을 대출해 이자를 수취하는 특혜를 과연 누가 행사하고 또 누려야 할까요? 지금처럼 은행이라는 특정한 소수의 ‘민간주체’가 해야 할까요? 아니면 중앙은행과 같은 ‘공공주체’가 이 특권을 독점 행사하여 그 특혜를 국민 전체가 누리도록 해야 할까요? 곰곰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눈치 빠르신 분께서는 이 이자라는 특혜가 시뇨리지(뉴스레터 5호 참조)의 실현방식의 하나라는 사실을 알아챘을 겁니다. 그리고 상상력이 풍부한 분이시라면 ‘상환도 이자도 필요 없는 채무 없는 통화’의 창조가 공상(空想)은 아니겠구나 하는 생각도 드실 법 합니다만...
이자 이야기는 아직 끝이 아닙니다. 다음 호에서는 이자의 존재가 경제 전체의 관점에서 어떤 모순 내지 부조리를 낳는지를 알아보고자 합니다.
사진 출처 : https://mattler.eu/le-droit-de-seigneuriage-existe-enc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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