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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 도시이야기

마산항지(1926년) - 19 - 건권(乾卷) / 제5장 근고사(近古史)

by 운무허정도 2022. 10. 17.

제5장 근고사(近古史)

 

4. 마산의 이름 유래

히데요시 전쟁(임진왜란)이 끝나면서 곳곳에 역병이 유행하여 창원성(昌原城)이 있는 오산진(午山津)에서는 날마다 송장이 산더미를 이루는 참상을 보였다. 오십인총, 삼십인총, 이십인총 등이 도처에 나타나 살아남은 노인들이 상의해 풍수사(風水師)를 불러 신의 마음을 헤아리게 했다.

신에 빙의한 풍수사가 이르기를, 오산의 오(午) 자는 오래 산다는 길한 자인데 저주받은 이 땅에서 그 글자를 씀으로써 신의 노여움을 샀느니 라고 했다.

상의 끝에 오(午) 자는 말 마(馬) 자와 동의어라 오산을 마산으로 고치기로 하니, 이것이 오늘날 마산부 이름의 유래(당시 민간에 떠돌던 하나의 속설로 보인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훨씬 전인 세종 7년(1425)에 편찬된 ‘경상도지리지’나 조선왕조실록 세종 10년(1428)의 기사 등에서 이미 ‘마산포(馬山浦)’라는 이름이 등장하기 때문이다.)인 것이다.

최근 지방구회 개정에서 이 땅을 창원군에 편입했음은 얼마나 상식이 모자란 것인지, 당국이 하는 꼬라지에 할 말이 나오지 않는다.

 

5. 신마산포의 출현

조선왕조 18세 현종 4년(1663), 경상도에 대동법(大同法)이 시행(1908년(광해군 즉위) 경기도에서 최초로 시행된 대동법은 1677년(숙종 3)부터 경상도에서도 시행되었다.)되었다. 대동법이란 공납으로 논 한 결(結)마다 추수미는 쌀7말, 춘수미는 6말을 경창(京倉)에 납부하는 것이다.

이 때문에 창원, 함안, 칭원, 창녕, 영산, 의령, 진해(현 진동), 고성, 사천, 진주, 밀양, 김해, 거제 등 13군의 공미(貢米)를 취합하게 된 것이다.

오산진 지역의 갈대 해변 일각에 조창을 설치(마산포에 조창(馬山倉)이 설치된 해는 1760년(영조36)이다. 마산창은 창원, 함안, 칠원, 진해, 거제, 웅천, 의령 동북면, 고성 동남면 등 8개 고을의 전세와 대동미를 모아 경창으로 운송하는 역할을 맡았다.)해 창원군수를 그 전운사(轉運使)로 겸무케 하여 수시로 공매토롱 하니 조창 일대는 갑자기 장족의 발전을 하고 공관(公館)과 민가 등이 홀연 즐비하게 되어 마친내는 동성, 중선, 서성, 오산, 성산, 성호의 여섯 개 동을 구성하니 바닷가의 갈대숲 옛 모습은 사라져 버렸다.

이 지역은 곧 마산진(馬山津)의 한 부분이어서 이를 총칭하여 신마산포라 하게 되고 본래의 마산진은 산호리 혹은 구장이라 불리어 매월 10일이 붙는 날은 원래 마산진에서, 5일이 붙는 날은 신포(新浦)에서 전기적으로 시장이 열리고 사방 4리 권내 사람들을 빨아들였다. 창원군수이자 조창의 전운사는 이 땅을 창원항이라 하며 항상 신마산포에서 거주했다.

시골구석인 창원읍치를 벗어나 산자수명한 데서 가악(聲樂)에 탐닉하며 가렴주구의 악정을 행하면서 선정비야 불망비야 세우라 독촉해대니 중앙중부의 내치와 외교가 다급해진 것도 까마득히 모르는 것이었다.<<<

<마산창 유정당>

 

이 글은 창원시정연구원이 2021년에 번역한 『馬山港誌』(1926) 중 19번 째 것이다. 그림은 별도로 삽입하였다. 『馬山港誌』는 1900년대에 발간된 일본 문헌 중 가장 가치가 높은 책으로 평가 받고 있다. 저자는 앞서 게재한 『馬山繁昌記』와 같은 스와 시로(諏方史郞)이다. 본 포스팅은 비영리를 전제로 창원시정연구원의 양해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