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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 도시이야기

마산항지(1926년) - 20 - 건권(乾卷) / 제5장 근고사(近古史)

by 운무허정도 2022. 10. 24.

5장 근고사(近古史)

 

6. 마산항의 개방

26세 희왕(熙王, 고종)은 국제관계를 고려해 사대주의를 일소하고 청국 숭배한 병폐를 고치려 했다. 조선의 국호를 대한으로 바꾸고 스스로 황제라 칭하며 태양력의 사용을 선언하고 단발령을 내리며 건양(建陽)이란 연호를 쓰고 다음 해에 광무(光武)로 개원하였다.

이듬해인 광무 2년 무술(戊戌, 1898)526, 한국 정부는 우리 정부의 요구를 받아들여 마산항과 함경북도 성진, 전라북도 군산을 자유항으로, 평양을 자유시장으로 개방할 것을 국제사회에 선언하였다.

이로써 창원항인 신마산포에 창원감리서(昌原監理署)를 두고 창원부윤 안길수(대한제국 시기의 관료. 1898년(광무 2) 고부군수로 부임하여 전임 군수 조병갑이 설치한 만석보(萬石洑)를 철거하였다. 마산포 개항 후 1899년 5월 11일 창원감리 겸 창원부윤으로 임명되었고 5월 24일에는 창원항 재판소 판사로 겸직 임명되었다. 1899년 6월 24일 창원에 도임하여 1900년 5월 16일까지 감리 업무를 수행했다. 이후 옥구부윤, 중추원의관, 안동군수 등을 역임하였다.)가 감리서 서리를 겸직하며 전의 조창전운사 아문(衙門)을 감리서 아문으로 충당케 했다.

안 감리는 일 년 이내에 개항이 과감히 행해지도록 외부(外部)의 명령을 받아 바로 창원군 외서면 내의 해안가 신월, 월영의 2개 동 지역의 138880평을 구획, 정리해 각국거류지(各國居留地)로 정하였다.(아래 그림의 붉은 색 부분)

<조계지 위치 및 조계지 초기 설계도>

 

거류지 주위, 한국 리()10, 일본 1리 이내를 개방하여 그 권내의 소유자에게는 임대 계약서 등을 발행해 그 매매 양도를 자유로이 하게하고 또한 각국거류지는 A호 즉 일등지, B호 즉 이등지로 대별하였고 각국 대표자는 부산세관장 이태리인 스가쿠리오(스카글리오티(A. Scagliotti, 생몰년 미상), 구한말 한국의 해관에서 활동한 이탈리아인. 부산해관에서 근무하다가 1899년 마산포 개항 후 마산해관지서의 초대 책임자로 왔다.) 씨에게 직함을 수여한 때는 명치 32(1899) 즉 한국의 광무 기해(己亥) 351일이었다.<<<

 

이 글은 창원시정연구원이 2021년에 번역한 『馬山港誌』(1926) 중 20번 째 것이다. 그림은 별도로 삽입하였다. 『馬山港誌』는 1900년대에 발간된 일본 문헌 중 가장 가치가 높은 책으로 평가 받고 있다. 저자는 앞서 게재한 『馬山繁昌記』와 같은 스와 시로(諏方史郞)이다. 본 포스팅은 비영리를 전제로 창원시정연구원의 양해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