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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 도시이야기

마산항지(1926년) - 53 - 건권(乾卷) / 제8장 거류민단 시대사요(時代史要)

by 운무허정도 2023. 6. 26.

26. 마산신사의 창건

 

 

마산 전체 항구의 우부스나가미(産土神, 조상신)으로 한 신령한 사당을 건립하자는 이야기는 혼마치의 히로시 세이조(弘淸三) 씨에 의해 자주 제창되었던 바이고 또한 무형단체이긴 하나 마산경제회에서도 화제가 된 바 있었는데, 솔선해서 그 임무를 맡아보려는 이가 없었다.

히로시 씨가 거류지 각 동네의 중심 되는 유지 27명을 요정 모치즈키(望月)에 모이도록 하여 신사 창건이 급선무하는 점을 강조하면서 동시에 해외거류민으로서 조묘(祖廟) 애호의 생각을 진충보국(盡忠報國)의 정신으로 함양하기 위해 우선 신조(神祖)의 영사(靈祠)를 숭배할 필요가 있다고 하였다.

모인 이들이 다 고대했던 일이라 마음속으로부터 찬의를 표방했다. 다음 날 두세 명이 이 문제를 두고 이사청을 방문하니 미마스 이사관도 크게 찬성을 했다.

세관장 사탱 예정지인 사쿠라오카(櫻岡) 면조계지(免租界地)를 공원으로 조성하려는 계획이었는데 이곳을 아마테라스 오미카미(天照大神)를 봉재(奉齋)하는 곳으로 지시하였다.

신사 창건의 기운이 고조디어 마산항 전체의 유지 1백여 명은 명치 42년(1909) 2월 8일, 마산소학교에서 회합을 가졌다. 협의 결과 정식으로 마산신사 창건위원 10명을 선출하여 이들을 서무, 회게, 기부의 세 반으로 나누었다. 마에다 민장은 위원장이 되고 저자인 나는 지진제식(地鎭祭式)의 재주(齋主)로 추거되었다.

저자는 당시 신궁봉재회(神宮奉齋會) 예부(禮部)의 직에 있었으므로 그렇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저자는 3월 3일, 미마스 이사관, 마에다 민장, 히로시 민회의장, 니시카와 제일은행 지배인, 민회 의원, 상업회의소 의원, 학교 교직원, 경찰관 기타 70여 명이 자리를 같이한 데서 지진제를 거행했다.

마에다 위원장은 바로 창립 예산액 5천 원의 기부를 민단구역 내에서 모급하려 함을 이사관에게 신청해 바로 인가를 얻어 활동을 개시했다.

그 지진제(아래 사진)를 통해 진정된 신이 모셔지는 지점, 약 두 자(尺) 네 면에 깨끗한 모래를 두툼하게 쌓고 그 위에 소금을 뿌려 작은 설산(雪山)을 만들고 주변 각 다섯 걸음의 거리 위치에 기등을 네 개 세워 주련(注連)인 새끼줄을 꼬아 걸고 나니 전날까지 농경으로 쓰던 땅이 다름 아닌 신성한 정원(淨園)이 된 것이다.

 

토목공사는 이와 함께 시작되어 신전(神殿)은 마산의 스에미츠 이소고로(末光磯五郞) 장인이 건조하게 되어 정원 근처에 용조를 놓고 직공과 더불어 매일 아침 목욕을 하고 일을 시작하였다.

신핵(神核)은 그해 10월 마에다 민장이 이세신궁(伊勢神宮)에 가서 받아오도록 했는데 후에 마에다 민장의 집안에 불행이 있어 아직 상복을 벗지 못할 시기라서 오사카에 타전하여 그대로 귀환토록 하고 당시의 민회 의장인 후지사키 도모히데 씨를 이세신궁에 보내 받아오도록 했다.

그런데 신사의 건물이 아직 완성되지 않아 바로 봉헌할 수가 없어서 한동안 이사청에 봉안하였다.

부산에서 초대한 신사 관리자인 아사노 시로사부로(淺野四郞三郞) 씨는 11월 11일 도착하여 그달 15일에 강신진좌(降神鎭坐)의 식을 성대하게 올리며 개전(開殿)하게 되었고 5월 1일을 예제일(例祭日)로 정하였다.

이듬해 5월 1일 이후 매년 이틀 동안 신을 모신 가마가 전체 항을 순회하며 또한 관민유지는 신사 옆의 공원에서 개항기념 축하회를 열고 청년 및 점원들은 당일 위안운동회를 개최하기도 했다.

이 신사가 있는 마산공원 즉 사쿠라오라(櫻岡)의 벚꽃은 그 조망과 어울려 구경꾼들이 몰려와 벚꽃나무 그늘이나 천막 쳐진 안쪽에서 들리는 현악 소리는 흥겹기만 하였다.

마산부청에서는 여기에 천막을 설치하여 게시하기를 “누구든지 자유롭게 천막 안을 이용하십시오”하고 하였으니 과연 테라시마(寺島) 마산부윤은 아주 속세의 지혜가 많은 평민주의의 인물이지 싶다.

원내(園內)에는 칙사화본(勅賜花本) 11세 불식암(不識庵) 청추옹(聽秋翁)의 구비(句碑, 하이쿠 시비)가 있다.

“천지가 온통 조화옹의 필치더냐 츠키노우라” (聽秋)

츠키노우라(月の浦) 마산의 별칭, 대정 10년(1921) 장마 때 어른은 만주를 만유(漫遊)타가 귀로에 마산, 진해의 하이쿠(俳句) 제자들을 만나러 마산항에 오셨다.

마산 백운사(白雲社) 결사의 미스모토크츠크츠당(松本欻欻堂) 무호오(夢峯) 댁에 머무는 8일 동안 마산의 제자들과 공원에서 놀고 산과 바다의 풍광을 격찬하여 이 하이무를 지어서 바로 신사 사무소에 들어가 종이에다 크게 써 놓은 것이다.

이 자리에서는 하이쿠 짓기가 시작되고 제목은 향어 즉 은어(鮎魚)로 삼았다. 저자인 백원방(白猿坊)도 말석에 앉아 아래와 같은 하이쿠를 지었다.

“정한(征韓)을 은어에 점친 옛적 있었네” (白猿)

어른이 선정한 결과 다행히도 우수 셋에 들어가더니 기어코 최상으로 낙점되니 요행이 따로 없을 듯하였다.

어른께서는 곧바로 뭇을 들고 나의 하이쿠에 다음의 하이쿠를 첨가했다.

“우리 일본의 바람이 훈훈하네 지금” (聽秋)

시비에 제막식은 다음 해 11월 1일 백운사 유지들에 의해 행해졌으며 관민 신수 명을 단풍나무 사이의 시비 앞에 모시고 소연이 베풀어졌다.

백원방도 역시 초대받아 아래의 하이쿠를 불러 축하의 뜻을 표하였다.

“구비가 세워졌네 풍년 들 가을” (白猿) <<<

 

이 글은 창원시정연구원이 2021년에 번역한 『馬山港誌』(1926) 중 53번 째 것이다. 그림은 별도로 삽입하였다. 『馬山港誌』는 1900년대에 발간된 일본 문헌 중 가장 가치가 높은 책으로 평가 받고 있다. 저자는 앞서 게재한 『馬山繁昌記』와 같은 스와 시로(諏方史郞)이다. 본 포스팅은 비영리를 전제로 창원시정연구원의 양해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