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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 도시이야기

마산항지(1926년) - 54 - 건권(乾卷) / 제8장 거류민단 시대사요(時代史要)

by 운무허정도 2023. 7. 3.

 

27. 진해만요새포병 마산 이전

명치 41년(1908) 봄 즈음부터 공사가 시작된 유현산(杻峴山) 아래 일본전관거류지 내의 일부에는 각종의 건축물이 차례차례 준공되고 광대한 연병장과 사격장도 완성되어 진해만요새포병대대는 사령부와 함께 가덕도에서 이전해 왔으며 그 전영식(轉營式)이 거행된 것은 명치 42년(1909) 9월 9일이었다.

이날 마산의 관민은 하사관 이하 병사들을 공원 사쿠라오카(櫻岡)에 초대해 환영회를 개최하였고 다음 날 10일에는 대대에서 마산의 저명인사 60여 명과 진해방비대 미야오카(宮岡) 사령관 이하 장교를 영내로 초대해 엄죽한 전영식을 거행하고 각종의 여흥 등이 있어서 성황을 이루었다.

 

28. 치바마을 어업감독 피살되다

율구미에 있는 치바마을(千葉村) 어업감독이며 치바 현 수산기사인 스즈키 마츠고로(鈴木松五郞) 씨는 포병대대가 병영을 병영을 이전한 그날 사무소에서 약 4정(丁 60간으로 약 109미터) 정도 떨어진 비탈길에서 참살되었다.

그 시체는 탐색 결과 길가의 송림 안에서 발견되었다. 당일 스즈키 기사는 현 보조금 분배에 관해 한 어부와 격론을 벌인 후 마산 거류지의 하숙집 호리에(堀江) 여관으로 돌아가는 도중, 이 비탈길에서 그 어부에 의해 습격당한 것이다.

그 어부는 범행 후 유유히 다른 어부가 보는 속에서 일본으로 돌아갔다. 범인의 흔적인 시체 옆에 버려진 식칼이 단서가 되어 범인을 알게 되었다.

마산경찰서는 곧바로 지바 현에 전보를 보내 범인이 지바역에 도착하는 것과 동시 체포, 마산시로 압송하였다. 이사청의 심리 끝에 징역 10년에 처해져 대구감옥에 복역했다고 전해진다.

 

29. 마산포의 동네 이름 개정

명치 42년(1909) 중에 이곳 마산지방 기타에 토지조사사업이 시작되어 마산포를 구성하고 있던 동성, 서성, 중성, 성산, 성호, 오산의 6개 동은 도미마치(富町-부림동), 사이와이마치(幸町-서성동), 고토부키마치(壽町-수성동), 모토마치(元町-남성동), 이시마치(石町-창동), 요로즈마치(萬町-동성동), 다와라마치(俵町-중성동), 신마치(新町-추산동)란 8개 마치(町)로 변하고 오동(午東), 산호의 두 개 동(洞)으로 갱신된 것 외에 옛날 명칭을 그대로 의거한 것으로 자산(玆山), 상남(上南)의 2개 동이 있다.

이 동네 이름의 선정 방법은 신마산 방면과는 그 취지를 달리했다. 신마산은 가로에 따라 명명된 것이며 여러 일이 편리하기는 내지의 각 마치와 거의 다를 바가 없었다.

그런데 마산포는 지역의 일부 사람들이 대충 명명한 것이어서 동일 도로에서도 그 양측이 동네 이름이 다르다든가 그 맞은편은 한 줄로 뻗어 있는가 하면 한쪽은 지렁이같이 꾸불꾸불하다거나 혹은 예각으로 배 모양이라든가 하여 실로 불규칙하다.

이 때문에 공공의 축하행사, 동네 매부 규약의 편성, 대표 선출 등 기타에서도 맞은편 동네와 다른 방식이라 일치단결하기는 불가능한 처지였다. 옛날 속담에 “맞은 편 세 집도 서로 이웃”이란 말처럼 이웃을 아끼고 사귀는 것은 꼭 필요한 데도 마산포의 많은 곳은 맞은편 세 집이 다른 동네라니 그 불편함은 추측이 갈 것이다.

거류민들은 모두 시의 구역 개정과 더불어 그 지명의 개칭 즉 동네 이름 박법 자체의 변경을 절실하게 의망하였던 것이다. 신마산 방면에서 중앙부에 걸쳐있는 오기마치(扇町-반월동), 다카마치(高町-대창동), 하나부사마치(英町-화영동), 니시키마치(錦町-해운동) 등의 명명도 이 토지조사 때에 이루어졌다.<<<

이 글은 창원시정연구원이 2021년에 번역한 『馬山港誌』(1926) 중 54번 째 것이다. 그림은 별도로 삽입하였다. 『馬山港誌』는 1900년대에 발간된 일본 문헌 중 가장 가치가 높은 책으로 평가 받고 있다. 저자는 앞서 게재한 『馬山繁昌記』와 같은 스와 시로(諏方史郞)이다. 본 포스팅은 비영리를 전제로 창원시정연구원의 양해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