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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 도시이야기

마산항지(1926년) - 77 - 곤권(坤卷) / 제6 숭경신앙기관(崇敬信仰機關)

by 운무허정도 2023. 12. 11.

8. 통도사 포교당(通度寺布敎堂)

대정 6년(1917, 마산포교당은 1914년 5월에 설립되었다)에 조선 제1위의 선교(禪敎) 두 종파의 대본산인 경남 양산군 영취산(靈鷲山) 통도사의 대화상(大和尙)인 김구하(金九河) 스님은 기독교가 왕성한 데 반해 조선불교가 부진한 것을 분개하여 이 포교소를 마산포 신마치(新町) 대로에 지었다.

 

수시로 선인(鮮人) 신도가 모이고 당번 스님이 설교를 하도록 하며 구하 스님도 역시 스스로 오셔서 법의(法義)를 사자후로 토하셨다.

불교 유청년을 교화하려고 옆에다 배달(培達) 강습학당을 설치도 하였지만 그 주동인 통도사 스님들 사이에서 분쟁이 일어나 마침내 구하 스님이 은퇴하기에 이르도록 혼란한 상황이 계속되어 학당의 실적은 볼 만한 것이 없게 되었다.

 

9. 기독교

완월동에 프랑스 구교의 교회당이 있으며 프랑스인 선교사 한 분(1914년 마산본당(현 완월성당)의 제4대 주임신부로 부임했던 목세영(睦世營, Julius Bermond) 신부)이 주재하고 있다.

조선인 교사와 함께 포교에 종사하는 한편, 옆에 학교를 설치해 수십 명의 선인 자제를 가르치고 있었다.

대정 4년(1915)부터 발발한 구라파 대전란에 선교사가 징집되어 프랑스로 돌아가게 된 이후로는 그 교세가 부진해 지금은 거의 유야무야 상태와 같다.

이에 반해 호주 장로교회가 이끄는 문창예배당은 마산포 신마치에 돌로 된 높은 건물을 가지고 일요일의 예배일에는 천여 명의 신자가 예배당에 넘쳐난다.

 

그 대부분은 영국인 선교사 마크 씨 내외가 이끄는 호신학교, 창신학교 및 의신여학교의 학생들인 것 같다.

종루에서 울려 퍼지는 종소리는 아주 음침한 기를 띠고 부근의 비신자들의 귀를 거슬리게 한단다. 마크레이 씨 내외는 일본어는 통하지 않으면서도(매크레이 목사의 부인(마가렛 S. 흠, ?~1948)은 일본 요코하마 출생의 영국인으로 일본어에 능통했다. 마산에 오기 전 일본 왕족의 가정교사를 하기도 했다) 조선어에는 아주 능통하고 스스로 자기 이름을 맹홍은(孟洪恩, 맹호은(孟皓恩)의 오기)이라 일컬으며 연설과 강의 등에서는 직접 그 사람을 보지 않으면 순수 조선인인 줄 알 정도라 한다.

찬미가 가사, 기도, 훈화 및 일상생활에서도 조선어만 사용하고 있다. 씨는 대정 14년(1925) 연말에 일 년 동안 연가를 얻어 영국에 가 있으며 현재는 그 대리인이 와서 제반 사무를 처리하고 있다.

교회와 학교를 유지하는 일은 결코 여유가 있지는 않을 것으로 추측된다.

일본 기독교는 후지하라 다케키(藤原建樹) 씨가 와 있던 명치 39년(1906)쯤 한때 대두하여 금주회(禁酒會)를 조직한다고 들었는데 그 금주회원 중에 아침부터 음주를 하는 사람이 있었고 그 바람에 신용을 잃고 한 번의 회합도 없었다.

간혹 미국 신학사인 고르테스 씨와 그 부인이 내항했을 때 머물던 여관에서 청강했을 정도에 그치고 말았다.

대정 9년(1920) 말부터 남조선철도회사가 마산에 이전해 오자, 이 회사의 간부들이 거의 모두 기독교 신자라서 그랬는지 그 아래 부하들도 따라 신자가 부쩍 늘었다.

매주 일요일에는 회사원 오치(越智) 씨 집에서 찬미가 노래소리가 들려오고 부활제 같은 날에는 특히 환희의 소리가 크게 들려왔다고 한다.

사설철도합동의 결과 많은 신자가 마산에서 퇴거해 지금은 적적해져 아멘소리는 전혀 들을 수가 없게 되었다.

 

10. 덴리교(天理敎)

나쁜 욕심을 버리고 옳은 길을 제시하는 천리교는 신마산에 하나, 나카마치(仲町)에 하나, 구마산 모토마치 (元町)에 하나, 오동동에 조선인이 교사(敎師)를 하는 하나, 합쳐서 네 군데에 교회가 있다.

다만 같은 이름이나 파는 다르다.

신자의 권유에 힘을 쏟는 것 같지만 혹자는 교의(敎義)는 도외시하고 기도나 부적 파는 짓을 일삼아 아픈 사람 있는 집에서 억지를 부리는 일도 있으니 일반적인 품평은 좋지 않다.

오동동의 조선인 교사의 내막은 잘 알 수는 없지만 의식 일체는 내지의 연중행사를 따르고 연말에는 떡을 빚고 새끼줄을 꼬아 달며 신전에 말린 벼의 짚방석을 깔고 봉사하는 모습은 내지인 교사가 보아도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라 한다.

 

11. 곤코오쿄(金光敎)

포교소인지 사사로운 개인의 것인지 그 진상은 잘 알 수가 없는데 교회 같은 것을 가지고 한둘의 신앙자가 있다고는 하는데 일반에서 볼 때 거의 존재는 인정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다.<<<

 

이 글은 창원시정연구원이 2021년에 번역한 『馬山港誌』(1926) 중 77번 째 것이다. 그림은 별도로 삽입하였다. 『馬山港誌』는 일제강점기에 발간된 일본 문헌 중 가장 가치가 높은 책으로 평가 받고 있다. 저자는 앞서 게재한 『馬山繁昌記』와 같은 스와 시로(諏方史郞)이다. 본 포스팅은 비영리를 전제로 창원시정연구원의 양해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