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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 도시이야기

마산항지(1926년) - 75 - 곤권(坤卷) / 제6 숭경신앙기관(崇敬信仰機關)

by 운무허정도 2023. 11. 27.

4. 소도슈우 마이즈루산 후쿠쥬지(曹洞宗舞鶴山福壽寺)

당 산사를 여신 이는 현재 사가(佐賀)현 니시마츠우라(西松浦)군 하타추(波多津)에 있는 요오주인(養壽院)의 주직이면서 동종의 순회포교사인 이데료오고(井手良梧) 스님이다.

스님이 조선 개교사로서 마산에 와서 여장을 홍법사(弘法寺) 미츠미야 류우코오(三宮隆晃坊) 암자에 풀고 신도를 소개받아 토오리마치(通町) 4정목의 민가에 가설포교장을 연 것은 명치 42년(1909)이었다.

알뜰하게 운영한 결과 신도의 기부금과 본산에서의 교부금을 받아 사원의 부지를 현재의 완월동 지역에 구입해 마침내 객전을 신축함에 이르렀다.

스님은 온후독실한 분이며 종지(宗旨) 여하를 막론하고 내외의 신망이 높아 양수원(養壽院)으로 귀산(歸山)하지 않을 수밖에 없게 되었고 마산을 떠날 때에는 모두가 자비스러운 아비와 석별하는 듯하였다.

제2세 주직이 된 분은 고에이 유모오(光英勇猛) 씨인데 얼마 되지 않아 사가 현으로 전직되고, 그 아우인 뎃슈 고에이 히로아키(徹宗光英博明) 씨로 교체된 것이 대정 8년(1919)이다.

스님은 연령이 젊은데도 법무 확장을 위해서 내외를 불문, 물불도 가리지 않을 만큼 활약하여 금방 조그만 암자를 만들어 그 주위에 33체의 관세음보살상을 배치하는 한편 주위의 접속지를 매수하여 절의 소유지를 확장하고 드디어 사회교화사업으로 복수야학회를 일으키고 선인 중에 가난한 자제들 백 명을 객전에 수용해 초등교육을 받도록 했다.

더 나아가 인접지를 매수해 교사 두 교실을 신축해, 이를 복수회 야학부라 이름하고 산업교육을 실시하게 되었다. 그 준민한 수완은 마산의 중들 사이에서 선망의 대상이 된 것이다.

마산관음부인회는 당 산사가 이끄는 조직이다.

 

5. 신곤슈 간쥬산 고오보오지(眞言宗還珠山弘法寺)

활달함과 담백함으로 세상의 신망이 많은 미츠미야 류우코오(三宮隆晃) 스님이 개창한 절이다.

스님은 도쿄 고이시카와(小石川) 메지로다이(目白臺)에 있는 승원(僧園) 석운율사(釋雲律師)의 제자인데, 그 기행이 많은 분이다.

러일전쟁 후 동료 스님 여섯 분과 함께 율사를 따라 만주에 가서 전몰자의 영혼을 조위한 후, 한국에 들러 용산에 넉 달이나 머물렀으며 일행과 함께 귀국하고 다시 스승의 명을 받아 도한(渡韓)하여 인천에서 석 달을 보내었다.

간간이 서신을 저자에게 보내와 마산의 상황을 파악하려 했다.

명치 41년(1908) 6월 28일 저녁 갑자기 인천에서 마산에 내려와 교마치 2정목의 내 집에 여장을 풀었다.

그때 말하기를, 인천에 있는 친구인 모리카와(森川) 씨한테 들은 바로는 이 집 주인은 신도를, 부인은 기독교를 믿는 신자라 하니, 내가 들어가 신불야(神佛耶, 신도, 불교, 기독교)란 삼각동맹(三角同盟)을 만들어야 하겠다는 것, 마산에 가서 법을 널리 포교하려는데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어봐도 항상 시기상조라고 해 사절을 당하니 끝내 못 참아 오늘 이렇게 내려왔다는 것이란다.

저자가 술은 마시냐고 물어보니 조금은 하겠다 하기에 바로 소고기를 안주로 술상을 마련했다.

스님이 먹고 마시고 안주의 날고기까지 드시는 것을 보니 주호(酒豪) 중에도 실력자라는 감이 들었다.

아침부터 마시고 저녁에도 취하고 있는 나날을 사흘 보내고 하숙집을 오카자키 가헤이(岡崎嘉平) 씨 댁으로 정해서 옮겼다.

그 후 신도를 모으는 데 노력하고 마산포의 오카모토 에이키치(岡本永吉) 씨 댁으로 이사 가서 야마모토 구니지(山本國次) 씨의 질병 쾌유를 기도해주니 그 효능이 현저히 나와 신망이 아주 두터워졌다.

마침내 현재의 이시마치(石町)에 있는 오카타 다스케(緖方太助)씨 소유의 민가를 빌려 금빛 찬란한 대문을 갖추게 된 것이다.

이러다가 신도 중의 거두인 마츠바라 하야조(松原早藏) 씨는 스님을 위해 환주산 기슭에 있는 소유지를 개척해 정신수양 도장이란 이름 아래 정사(精舍)를 건축한 것이 이해 10월 하순이었다.

스님은 장래 사원이 건축되었을 때는 정사를 지금의 암자 대신에 쓸 심산이었으며 그 후 몇 번이나 개수, 증축을 거듭했다.

그러나 대정11년(1922)에 술 탓으로 동맥경화증에 걸려 후쿠오카 대학병원과 각지의 온천에서 요양했지만 회복이 되지 않아 대정 13년(1924) 1월 29일에 입적하시니 향년 52세였다.

류우코오 스님의 법형이 되는 분으로 도쿄 요요기(代代木) 니시하라(西原)에 있는 운쇼지(雲照寺) 안에 있는 변용방(辯龍房)의 석의유사(釋宜猷師)의 법제자인 히라노 마사요시(平野政義) 씨가 후임으로 제2세 주직이 되어 크게 절을 깔끔하게 운영하였다.

스님은 도쿄에서 모친을 모셔오게 되었는데 이 분이 연세는 드셔도 활동적인 도쿄내기 분이라 와가(和歌), 생화(生花) 등에 재주가 있고 서예에도 뛰어나면서도 역(易)에도 밝아 빗나가지가 않았다고 한다.

본 가람은 장래 그 중앙부의 높은 곳에 건축을 준비하고 있다고 전해진다.

또한 장왕권현당(藏王權現堂)을 건물 안쪽에 건립할 계획도 있다는데 실행 시기는 언제가 될지 알 수 없다.

다이시코오(太師講, 교조의 가르침을 강의함)은 이 절이 주도하고 드러내는 것이다.<<<

 

이 글은 창원시정연구원이 2021년에 번역한 『馬山港誌』(1926) 중 75번 째 것이다. 그림은 별도로 삽입하였다. 『馬山港誌』는 일제강점기에 발간된 일본 문헌 중 가장 가치가 높은 책으로 평가 받고 있다. 저자는 앞서 게재한 『馬山繁昌記』와 같은 스와 시로(諏方史郞)이다. 본 포스팅은 비영리를 전제로 창원시정연구원의 양해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