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큰줄다리기(大索戰)
삭전(索戰)이란 내지의 소위 줄다리기이며 고래로부터 매년 음력 정월 15일 혹은 16일에 군(郡)의 중심에서 행해진 것이다.
당지에서는 창원군 읍내에서 이루어져 왔다. 창원군 관가가 개항 당시부터 마산으로 이전되었기 때문에 대정 2년(1913) 음력 정월 15일 밤에 처음으로 마산포 모토마치 끝머리의 매축지에서 개최되었다.
창원군도 역시 이 줄다리기를 따로 개최하고, 전에 진해군이었던 현재의 진동읍내, 전에 웅천군이었던 신흥촌인 현재의 진해면 경화동에서도 같이 이 경기를 하게 된 것이다.
그 경기란 개최 장소는 물론 사방 2~3리 떨어진 시골에서도 제각기 긴 뱀 같은 줄을 운반해 오며, 그 사람들이 살고 있는 동네의 방향에 따라 동서의 두 군(軍)으로 나눈다.
동군(東軍)은 동방수호신을 뜻하는 청룡기(靑龍旗)를 세우고, 서군(西軍)은 서방수호신을 뜻하는 백호기(白虎旗)를 세우고, 기타 농정기(農政旗), 신농기(神農旗) 이외에 수농(守農), 수곡(守穀)의 각 신기(神旗)가 수없이 양 군 속에서 펄럭인다.
이 경기의 승패는 직접 그 방향 고장의 생산물의 풍흉작에 관계된다는 미신이 있어, 양군 더불어 응원하는 보조세력이 많이 있기를 바라며 가까운 동네의 사람들을 권유해 술도 줘가며 아주 열심이라고 전해진다.
그리고 본 줄은 직경 약 3자 조금 모자라는 크기로 둘레가 9자 내외인데 절단될 우려가 있어 마닐라삼 로프 혹은 와이어 로프나 기타 딱딱하고 질긴 것을 끼우기도 한다.
전체 길이는100간(間, 180미터)에 이르며 그 줄의 끝은 뱀의 입처럼 되어있다.
옆줄의 크기도 본 줄의 그것과 비슷하거나 혹은 한두 아름이 되는 것도 있어 그것이 한 군데서만 몇 십 줄도 되니 그 줄 값만 해도 천원을 넘길 때도 있다고 한다.
그 경비는 내선인 각 집에서의 기부금과, 십 수 일 전부터 청년들이 떼를 지어, 노세 노세(農政, 우리 말 '노세'를 '노오세‘로 발음되는 일본어 農政(のうせい)'로 표기한 것으로 보인다)라 외치면서 관공서 및 집집을 찾아가 기부를 모아 충당하는 것이다.
양 군의 본 줄은 대개 전날 저녁때까지는 경기장인 모토마치 식산은행 지점 앞을, 양 군의 뱀 입을 연결할 중심점으로 해서 200여간 거리에 놓이게 되며, 서로 적군이 줄을 만지지 못하도록 경계를 하면서 밤을 새운다.
다음 날 아침부터 각 방면에서 사람들이 모여들어 경기 참가자와 관람자는 줄이 있는 주변에 넘치고 마산포 전체가 활기를 띄게 된다.
경기 참가자는 양 군을 합쳐 1만3천 명이며 관람자 역시 이와 비슷한 숫자다. 양 줄의 큰 뱀이 서로 상대방의 입을 물어뜯으면서 그 사이에 큰 나무 기둥이 끼워질 때까지는 서로 기운을 돋구어 제 자리를 잡는데 2~3시간을 요한다.
바야흐로 개전의 호령이 나오자 양 군은 죽을힘을 다해 당기고 서로 관중의 응원을 최촉하고 옆줄이 끊어진 데는 다시 맺기도 하니 휴전도 여러 번이라 그 결승점에 도달하는 데는 약 1시간은 필요하다.
승패는 근근히 2~3간 내지 5~6 자 차이 정도가 보통이며 결승 종전의 호령이 나자 우승군은 바로 경축하는 춤패를 내어 시중을 들며 춤을 추는 것이 밤까지 계속된다.
이 줄다리기의 줄들은 한 번 쓰고 나면 그만이어서 다음 날 경매에 붙여져 때로는 5~6백 원으로 경락될 때도 있다고 한다.
모두 풀어져서 어업용 줄로 사용되는 것 외에는 도배용의 재료로 혹은 퇴비의 원료가 된다고 한다.
이 양 군의 뱀 입 해체에 관해서는 아주 괴이한 미신이 패한 군과 관련해서 있다.
이 입 해체에 종사한 자는 3년 내 위험한 병에 걸려서 목숨을 잃게 된다는 것이며 만약 본인이 그렇지 않으면 친척이나 처가 쪽에 그와 같은 액운이 온다는 것이다.
이러니 아무도 이 해체 일에 내키지 않아 하고 그 인선에 매번 분규가 생겨 해체작업이 이루어지지 않아 줄들이 그대로 2~3일씩 방치될 때도 있다고 한다.
이 줄다리기는 대정 2년(1913)부터 동 8년(1919)까지 모토마치 매축지에서 행해졌지만 대정 8년(1919) 봄에 조선 내 곳곳에서 독립시위의 만세 소요가 돌발한 이래 어디서나 이 경기와 같은 군중 행위는 금지되었다.
대정 13년(1924)에 이르러서야 해금이 되었는데 매축지에는 이미 집들이 즐비하여 경기장으로 삼을 빈 땅이 없어진 것을 고심 끝에 모토마치(元町), 요로즈마치(萬町), 고토부키마치(壽町)의 대로 사용을 당국에 탄원했는데, 음력 정월 17일 밤에 식산은행 지점 앞을 중심으로 행해졌으며 다음 해에도 여기서 개최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 구역은 통행이 빈번한 곳인 데다가 자동차, 우차, 인력거의 왕래가 끊이지 않는 곳인지라 대정 15년에는 당국이 이를 폐지하려는 의향이 있었다.
또한 줄다리기를 굳이 한다면 중앙공설운동장에서 하면 어떻겠느냐는 제안도 당국에서 나왔지만 관례상 경기는 옛날부터 시가지 중심에서 하는 것이라서 선인의 유력자들이 선인 공직자와 더불어 일체의 책임을 자기들이 지겠다는 여러 번의 간청 끝에 겨우 주간 시간대에 하되 끝내 야간까지 미치지 않는다는 조건 하에서 모토마치 중심의 실행 허가를 받아 음력 정월 19일에 실행했던바 근년에 없었던 3만에 이르는 대중을 맞이하게 되었다.
4. 널뛰기
청소년기 여자들이 옛적부터 해 오던 가정에서 하는 유희다.
서양문물인 서학이 슬슬 들어오는 경향을 면치 못한 조선일지라도 현재까지는 9푼 9리까지 동학파의 영역이라 하겠다.
서학이란 서양의 학문이다.
동학은 동양의 학예 즉 요(堯), 순(舜), 우(禹), 탕(湯), 문(文), 무(武), 주공(公), 공자(孔子)를 주로 하는 유교를 배우고, 남녀 일곱 살부터는 한자리에 앉지 않는다는 식의 완고한 습관에 사로잡혀 오던 여자는 다 비좁은 온돌방에서 생활하다가 오로지 추석과 정원 설날에 몸의 자연적인 요구로서 널뛰기 놀이를 하는 것은 오늘날에도 변함이 없다.
선인은 이를 널뛰기라 하며 양쪽 땅은 파서 구멍을 내고 중앙부에는 흙을 올려 여기에다 폭 6~7자 길이 3자쯤의 널빤지를 놓고, 경기하는 여자는 각자 널빤지 끝머리에 서서 교대로 뛰어 밟아 뛰어오르는 것이다.
잘 뛰는 아이는 교묘하게도 약 5자 정도까지 뛰어오르나 유약한 내지인 여자아이들은 도저히 흉내낼 수 없는 재미있는 운동이나 자칫 잘못 뛰면 추락할 위험을 느끼게 할 때가 있다.<<<
이 글은 창원시정연구원이 2021년에 번역한 『馬山港誌』(1926) 중 108번 째 것이다. 그림은 별도로 삽입하였다. 『馬山港誌』는 일제강점기에 발간된 일본 문헌 중 가장 가치가 높은 책으로 평가 받고 있다. 저자는 앞서 게재한 『馬山繁昌記』와 같은 스와 시로(諏方史郞)이다. 본 포스팅은 비영리를 전제로 창원시정연구원의 양해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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