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산항지 해제
창원학연구센터 초빙연구원 한석태
창원시정연구원 창원학연구센터에서는 『마산번창기』 번역에 이어 동일저자의 『마산항지』를 번역하고 각주 등을 통해 해석하는 일을 속행하게 되었다.
마산과 진해지역은 일본 제국주의가 건설한 대표적인 식민도시였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식민도시 건설 당시 일본인의 시각과 사관에 의해 기록된 문헌자료 가운데 『마산항지』는 분량 면에서나 내용의 충실도가 뛰어난 향토 지리지라 할 수 있다.
1906년 마산에서 거주하기 시작하여 1926년에 이 책을 발간하기까지 20여 년을 마산에서 식민도시 건설에 직, 간접적으로 참여한 스와 시로(諏方史郎)는 『경남사적』(慶南史跡)과 그 『보유』(補遺)를 집필하는 등 문필과 저술활동을 펼치다가 이듬해 1927년 2월 8일 타계하여 마산에 그 뼈를 묻게 되었다.
스와 시로는 일본 동복지방의 석유(碩儒)로 이름을 떨친 부친 고슈(翁洲)의 차남으로 부친의 영향으로 일찍부터 시문에 눈을 떴다고 한다.
부친은 아이즈와카마츠(會津若松)란 대번의 무가 출신으로 에도쇼헤코(昌平黌)에서 10년간 수학하고 귀향한 후 일신관(日新館)의 교수로 재직하였다가 보신전쟁(戊辰戰爭)에 연루되어 참전했다.
이때 지금의 후쿠시마 현인 아이즈번의 몰락을 보게 된다.
유폐의 고초를 겪은 후 와카마츠현 양성학교장 겸 예과학과장, 후쿠시마 현 제3사범학교 학감을 역임하고 1888년 미야기 현 센다이 시에서 세이신기쥬쿠(聲振義塾) 관사숙을 열고 한문을 가르쳤다.
동북의 두 석학 중 일인으로 평가받는 인물이다.
『마산항지』의 저자는 어릴 적부터 부친의 훈도에 따라 영문, 한문, 일문을 배우고 일찍이 지리, 역사에 취미를 가졌다고 한다.
몰락한 계급이 대만과 조선에 진출한 사례의 한 전형으로 저자의 이동 경로를 확인해 볼 수 있다.
정한(征韓)의 주도 세력인 현양사(玄洋社) 계열의 인물들과 교류한 흔적이 두드러지기도 하였다.
저자는 1906년 3월 마산에 도착하기에 앞서 대만에서 일정 시기를 보낸 후 인천을 거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해 6월 하순부터 기록하기 시작하여 1908년 9월에 『마산번창기』를 발간한 후 이를 보강하고 확대·심화하여 내놓은 것이 바로 『마산항지』인 것이다.
저자는 부산일보 마산 주재기자, 마산에서 발간된 남선일보의 고문 등을 역임한 언론인으로서 기록에 특징을 지닌 기자 출신이면서 마산신사 건립 당시 지진재식(地鎭齋式)의 재주(齋主)로 추거될 만큼 일본 국가종교인 신도(神道)를 숭상하는 국수주의자이기도하다.
“정한을 은어에 점친 옛적 있었네"라는 하이쿠를 마산신사의 시회에서 읊은 것을 자랑하기도 한다.
식민도시 건설의 한 주역으로서 마산민회 의원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기도 하였다.
이때 저자의 본명인 부고츠(武骨)가 촌스럽다는 비방을 받아 역사 연구자임을 표방하는 시로(史郎)로 개명하고 거동노부(去洞老夫), 스와 쇼오센(諏方松仙)이란 아호와 필명을 사용한다.
시작(詩作)에는 하쿠엔보(白猿坊)라는 별칭을 쓰기도 한다.
일본인으로서의 한국의 역사를 정한의 사관에 입각하여 정리한 점은 일본 국수주의자의 시각을 가감 없이 드러내 준다.
마산에서의 친일 개화파의 거두, 박영효(朴泳孝)와의 교분을 자랑하고 조선인과 일본인 사이의 혼인을 장려하는 등 저자의 식민지 건설 의욕은 일관된다.
조선에서 뉴 재팬(New Japan), 신일본의 도시 건설에 최적지로 마산을 꼽은 저자는, 노일전쟁 후 동양 정국이 안정되면 제일 먼저 일본의 천황을 모시고 싶은 곳이 진해만에 깊숙이 자리한 마산이라고 할 만큼 마산의 지리와 풍광에 대해서는 열광적이다.
고노에(近衛) 귀족원장의 별장터, 대정(大正) 천황의 동궁 시절 마산항 방문, 이토오(伊藤) 통감의 잦은 내유와 별장터, 순종 황제의 남순(南巡) 행차 등을 열거하며 마산의 기후와 지리에 대해 자신의 고향보다 더 예찬한다.
마산항의 대관, 영광이 넘치는 마산의 산수, 마산 상고사, 마산중고사, 마산 근고사, 마산개항사, 일본인 동포발전사, 거류민단 시대사를 내용으로 하는 여덟 개 장으로 건권(乾卷)을 구성하고 곤권(坤卷)에서는 개황 일반, 마산의 교육기관, 운수교통기관 보건의료조산원, 통신기관, 숭경신앙기관, 금융기관, 경비기관, 사직기관, 창원군청, 기업전습소, 남선일보사, 공장 및 여러 회사, 여러 단체, 긴지로(金次郞) 문고, 월포원(月浦園), 중앙공설운동장, 일용품 수급기관, 마산미곡상조합, 마산주조조합, 오락기관, 마산멸치판매조합, 마산의 경제 현황, 문화를 향한 선인의 잡속, 내지인의 거주 상황, 내지인의 오락과 위안, 선인의 잡속, 내선 융화의 체조와 언어, 마산의 장래 시가지와 매립지 등 29개 장으로 편성하였다.
건권이 통사적 접근이라면 곤권은 공시적(共時的) 서술이라 하겠다.
권말에 마산의 장래에 대한 희망과 염려를 덧붙임으로써 사론, 지리지 논설의 주제 의식을 가미함으로써 본 저술의 값어치를 배가 시켜 준다.
가까운 장래에 실현되어야 할 마군마목(馬群馬木) 철도, 신시가지의 실현이 가까워지고 있다.
신마산 해안 간석지 매립, 마산포 각 도로 및 기타의 정비, 마산 민중의 소리, 마산부의 위치, 유곽 문제, 중학교 문제, 마산우편국 문제 등을 거론함으로써 당시 마산이 당면한 과제들을 적절하게 짚어 주기도 한다.
원저의 번역은 마산번창기의 경우와 같이 하동길(河東吉) 선생이 맡아주셨다.
재일동포 유학생으로 서울대학교 문리과 대학 정치학과와 대학원에서 수학한 후 일본에서 교토국제중고등학교의 교장을 역임하고 한겨레신문에 상당 기간 투고하는 등 재야사학자로 활동하는 중이다.
일본 속의 가야국 자취를 찾는 데 열중인 하동길 선생의 번역은 해일(解日)의 일환이기도 하다.
각주 작업 역시 『마산번창기』처럼 우리 지역사 연구와 기록의 전문가인 박영주(朴永周, 아래 사진) 선생이 수행해 주었다. 원저의 오류를 빈틈없이 찾아서 수정한 내용을 각주에 충실하게 반영하였다.
마산의 지명이나 함안의 파수(巴水)로 오인한 절령(岊嶺)을 교정한 점 등은 이 지역 전문사가의 안목이 아니면 짚어내기 어려운 바이다.
끝으로 윤문과 해제는 창원학연구센터의 초빙연구원 한석태(韓錫泰)가 맡았다.
2021년 8월
창원학연구센터 초빙연구원 한석태
이 글은 창원시정연구원이 2021년에 번역한 『馬山港誌』(1926) 중 116번 째, 마지막 것이다. 그림은 별도로 삽입하였다. 『馬山港誌』는 일제강점기에 발간된 일본 문헌 중 가장 가치가 높은 책으로 평가 받고 있다. 저자는 앞서 게재한 『馬山繁昌記』와 같은 스와 시로(諏方史郞)이다. 본 포스팅은 비영리를 전제로 창원시정연구원의 양해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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