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공놀이, 헌병사령부 축구팀
우리 어릴 때 겨울 빈 밭에서 새끼로 동여맨 짚 뭉치를 차고 놀던 기억이 있고, 간혹 있은 잔칫집에서 나온 돼지 오줌보에 물을 넣어 차고 놀던 일도 어렴풋이 기억의 한 자락에 남아 있다.
형들이 흉내 내는 데 따라 짚 뭉치 잡고 던지고 뺏으면서 듣기만 한 럭비를 한답시고 빈 밭고랑과 둑을 쓸던 기억도, 푸석푸석한 밭이라 살이 아프지 않아 좋았던 느낌도 어렴풋이 남아있다.
고무로 된 공을 본 건 전쟁 중 반쪽 운동장에서 처음이었던 것 같고, 가죽으로 된 공을 만져본 건 정전 전후였던 것 같다. 군용물자들이 대거 민간에 불하되어 시중에 나오면서 고무제품이나 가죽제품들이 가공되어 우리들에게 까지 영향을 준 것 같다.
까만 고무주머니에 바람만 넣은 공이었지만 보통 아이들이 가지기엔 아직 귀한 것이었기에 운동장에 한두 개만 튀어 다녀도 백여 명의 아이들이 공 따라 뛰어 다니던 일이 일상이었다.
그러니 공 가진 아이들의 위세는 대단했다. 방과 후에 벌어지는 축구시합에 선발되려면 그 아이에게 잘 보여야 하는 것이 필수였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경기 때도 그 친구는 주장 노릇을 했고 모든 멤버들이 그 아이에게 패스해 주는 걸 잊지 않았다.
합포초등학교라 잘못 세게 차면 종종 공이 바다에 빠지기도 했었는데(지금 학교 동쪽 길 건너 라이온스 회관부터 바다였다) 그때도 다투어 바지를 걷거나 벗고 들어가 공을 건져왔다. 심지어 겨울에도 그랬다.
<공을 잘못하면 바다에 빠졌다는 당시 합포초등학교와 현재 상황 비교>
가죽공이 눈에 익은 건 정전 이듬해부터 활성화되기 시작한 8·15체육대회 때부터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경기 전부터 방과 후에 하는 선수들의 연습 때도 많이 보았거니와 중학교 진학 후엔 체육시간에도 농구공이나 배구공 등은 만져볼 수 있었다.
그러나 별 실력을 가지지 못한 일반 학생들도 참여할 수 있었던 축구공차기는 마산중학교가 가졌던 운동장 여건 때문에 3년 내내 한 번도 가질 수 없었다.
마산고등학교도 운동장 반쯤에 판자 가교사를 지어 교실로 쓰고, 나머지에 농구장, 배구장, 철봉시설 등을 하였으니 축구는 엄두도 못 낼 여건이었기 때문이다. 야구 연습도 공 던지고 받기 정도만 하는 걸 보았고 배팅연습이나 실전훈련은 무학초등학교 운동장을 빌어 하는 걸 보았다. 체육시간에 배구공도 멋모르고 세게 쳐서 공 찾아 완월초등학교 운동장을 헤매는 일도 종종 일어났었다.
그런데 전후에 활기를 띈 운동 중에서도 특히 축구가 중고교 팀들과 군인 팀들에서 활성화되었던 것으로 기억되는데 그 계기를 준 것은 당시 마산에 와있었던 헌병사령부 팀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 팀에 국가대표 유명선수들이 여러 명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 생각하는 선수로는 골키퍼 함흥철과 센터포드 최정민이다.
함흥철은 50년대 한국축구계에선 보기 드문 국제수준의 골키퍼로 평가 받은 선수였다.
<함흥철 (1930년 ~ 2000년) / 한국축구1세대 수문장이자 국가대표팀 감독 역임>
우리는 마산상고 운동장에서 골문을 지키는 그의 유니폼 꿰맨 부분과 방귀소리(그가 옆으로 날면서 내는 방귀소리는 당시 우리들의 화제로 돌아다녔다.)에 낄낄거리기도 했지만 몸을 수평으로 날리면서 강슛을 쳐내는, 그때로선 상상도 못한 묘기를 실제로 보면서는 경이감을 금치 못하기도 했었다. 그때 그의 유니폼은 긴 바지 긴 소매였었는데 지금 생각하니 잔디구장이 없었던 여건 때문이었던 것 같다.
최정민에 대한 기억은 선명하지 않은데, 아시아 최고의 공격수였다는 평가만 머리 속에 있다. 그 외에도 우상권 등 국가대표급 선수가 두세 명 더 있었다고 들었던 것 같은데 생각나지 않는다.
<1950년대 ‘아시아의 황금 다리’로 불리며 한국 축구를 대표했던 최정민 전 축구대표팀 감독(1930~1983)>
그들이 연습상대가 없어 진해 해군사관학교 축구팀이나 통제부 팀, 아니면 마산고, 마산상고 팀들과 어울렸던 것 같은데 그 팀들로선 과분한 상대 덕에 전력도 향상시키고 학생들의 관심도 더 받았던 것 같다.
우스운 이야기 하나.
우리 초등시절에 신화처럼 화제에 올라있던 마산 출신 대표선수, 이름은 안종수였다.
올림픽 경기에서 그가 쏜 슛이 상대 골키퍼를 기절시켜 상대국 응원자가 권총을 빼들어 쏘았는데 그가 총알을 피했다느니 하는, 지금이라면 유치원생이라도 믿지 않을 소리들을 그때 우리들은 다투어 떠들곤 했다.
내가 성인이 된 언젠가 일간지에서 읽은 ‘한국축구사’에서 그의 이름을 보고는 실소를 흘렸던 기억이 있다. 그가 마산 출신임은 확인되었으나 그의 실력은 교체 멤버 정도의 위치였다.<<<
박호철 / 창원미래연구소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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