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바냇들, 부림시장
정전 다음해 진학한 마산서중(전쟁 중인 1951년 9월 1일 6년제 마산공립중학교가 3년제 마산고와 마산서중으로 분리되었다. 마산서중이 현재의 마산중학교로 교명을 변경한 것은 1955년 5월 7일이었다) 3년 동안엔 거의 매일 바냇들 길로 다녔었다. 등교 땐 공군병원 스리쿼터를 많이 탔지만 하교 땐 거의 빠짐없이 그 길로 다녔다.
당시엔 모든 학교가 오후 세시경이면 파했기 때문에 부림시장, 철로, 바냇들에서 구경하고 장난칠 여유가 좀 많았었다.
바냇들은 용마산과 문둥산(반월산을 두고 그 땐 그렇게 불렀다. 거기에 한센일들 집단 수용소가 있었기 때문이다) 사이 꽤 넓은 들을 말하는데 동쪽 끝은 국도2호선, 서쪽 끝은 회원동 창신농업고등학교(현 회원동 한효아파트)까지를 대강 그렇게 불렀었다.
동쪽 끝에는 신흥방직주식회사(일제 때부터 있어온, 짐작에 만여 평이 넘었던 듯한 공장. 지금 신세계백화점 남쪽)가 있었는데, 1960년대까지도 존속했던 큰 회사였다.
1956년쯤 시내쪽으로 인접해 신한가공이라는 회사가 설립되고 그 바로 옆으로 새 길이 남으로써 산호동에서 회원동까지 차가 다닐 수 있는 벌판길이 형성되었다.
들 동북쪽, 지금의 종합운동장 위치 정도에 벽돌공장이 있었고, 그 남쪽 칠팔십 미터 쯤에 네댓 채의 집과 두세 채의 집이 각각 있었을 뿐 주로 논뿐인 그야말로 허허벌판이었다.
그런데 그 들판에 대한 기억으로 배배꼬인 벼 잎이나 갈라진 논바닥이 거의 전부이고, 누렇게 물든 풍요로운 들판의 기억은 없다.
지금 생각해보니 들판 규모에 비해 수로가 너무 빈약하여 가뭄을 많이 탔던 것 같다. 수원(水源)은 무학산 밖에 없겠는데 수로가 몇 안 되고 작아 벌판 남북을 횡단해 나 있었던 철로(현 3·15대로) 아래쪽으로는 물이 얼마 안 흘렀던 것으로 기억된다.
<1950년대 바냇들 지도와 현재>
우리 동네에서 선배 세 명, 동기 네 명, 후배 한 명이 함께 다녔으므로 으레 등하교 때 두세 명이나 네댓 명이 함께 다니기 마련이었다.
학교 파하면 몽고정에서 두레박 물을 얻어 마셔가면서 철로변(현 3·15기념탑 옆 도도록한 지역이 구마산 역이었던 현 육호광장에서 신마산 역이었던 월포동 벽산블루밍아파트로 가는 철도 부지)를 따라 부림시장을 지났다. 시간에 쫓길 땐 철로 따라 바로 갔지만 대부분의 경우 볼거리가 많은 시장 길로 다녔던 것이다.
전쟁 중에도 그랬지만 정전 후에는 더 많은 군용물자들이 흘러나와 사람들을 많이 불러 모았다. 거기에다 온갖 약장수, 마술사 등이 재주와 속임수를 부려 사람들을 모았다. 우리들은 그런 것들을 기웃거렸고 때론 넋을 잃기도 하면서 다니는 것이 재미있었던 것이다. 보는 재미도 있었지만 그걸 배워 흉내 내는 재미도 꽤 괜찮았다.
생각나는 하나가 있다.
사오십 센티 정도의 철로 조각 위에 돌을 올려놓고 수도(手刀)로 내려쳐 깨는 위력에 감탄하며 한참 보다가 집으로 향했는데, 구마산 역을 넘어 철로타고 오다가(철로 위로 걷기를 즐겼었다) 한 친구가 그걸 보여주는 것이었다.
처음엔 우리도 어리둥절했었는데 설명을 듣고 해보니 의외로 쉬웠다. 왼손바닥 오른쪽 끝으로 돌 끝을 잡고, 왼손 등을 철로에 붙이고, 돌이 철로에서 일 센티 정도 떨어지게 하고는 오른손 수도로 돌을 내려치면 순간적으로 돌이 쇠에 부딪치면서 깨어진다. 사실상 속임수였는데 우린 그걸 또 후배들한테 써먹으면서 우쭐대기도 했었다.
일 년에 한두 번이었지만 부림시장에서 구마산 역으로 가다 들렀던 환상적인 맛집도 생각난다.
지금 백제삼계탕 앞 주차장에 있었던 중앙중학교 담벼락에 붙여 지은 판잣집 가게였는데, 젠자이(단팥죽의 일본말)에 국화빵을 찢어 넣어 먹는 맛은 그때의 우리들에겐 그야말로 꿀보다 더한 맛이었다.
<합천 5일장에 가면 지금도 국화빵 넣은 단팥죽을 사먹을 수 있다>
구마산 역에서 삼사백 미터 가다가 용마산 끝자락쯤에서 벌판길로 들어서는데(지금 운동장 방향의 길) 거기에서 왼쪽 길로 가면 한센인들 집단촌을 거쳐 율림동, 합성동(그때는 창원군)으로 가고, 오른쪽 길로 곧장 가면 신한가공 쪽이었다. 이 길로 가다가 왼쪽으로 비스듬히 가면 어린교로 통했는데(현 백화점 북쪽 옆길 쯤) 이 길 외에도 군데군데 논두렁길 길들이 많았다.
들 가운데쯤에 삼사기 정도의 묘역이 있었는데, 지금 추상으로 이백여 평은 족히 되었음직한 넓이였다. 우리들은 여기에서 온갖 장난질을 다하며 놀았다.
무릎치기, 말놀이 등을 많이 했고, 긴 풀잎끼리 맺어 걸려 넘어지게 하는 소위 ‘결초놀이’도 했다. 감정을 못 푼 친구끼리 혹은 타교생끼리 한판 겨루는 장소로도 활용되었고, 동중이나 창신중에 다니는 동네친구 만나는 장소이기도 했다.
부모님 속여 모은 돈으로 부림시장에서 깡통(미군용 휴대식품 통조림) 몇 개 사서 파티 장소로도 거기가 안성맞춤이었다.
한편 한센인들과 애기들을 연관시킨 무서운 소문들이 떠돌았던 때라 어둑살이 지면 그쪽으로 두려움의 눈길이 가기도 했고, 용마산 북쪽비탈에 자리 잡은 공동묘지도 비 오고 컴컴해질 땐 공포감을 주기에 집으로 걸음을 재촉하기도 했었다.
박호철 / 창원미래연구소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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