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아이스케키
아이스크림이나 팥빙수도 있었지만 수요가 많지는 않았었다. 학교 앞이나 시장 입구 등에 리어카를 세워놓고 수제로 만들어 파는 정도였다.
소금 뿌린 얼음 통을 손으로 돌려 냉각시킨 아이스크림은 즉석에서 고깔과자 같은 데에 담아 팔았고 대팻날 같은 데에 얼음덩이를 올려 즉석에서 갈아 팥, 향료, 설탕 등을 얹어 주던 빙수는 접시나 사발에 담아 팔았었다.
거기에 비해 아이스케키는 공장을 두어 제조했고, 보온 질통에 넣어 거리에 다니면서 파는 아이들이 마산에만도 이백 명이 넘을 정도로 판매규모가 방대했었다.
한편으론 어려운 집들의 청소년들이 학업도 포기해가면서 다투어 나섰기 때문에 더 붐이 일었다고도 볼 수 있겠다.
어쨌든, 당시 도심 거리에 나가면 여기서 아이스케키! 저기서 께에끼! 그러다 한 사람이 ‘께끼’하고 부르면 여기저기서 두세 명이 달려오고, 반 미터 정도 늦어 돌아서야 하는 소년들의 이마와 목덜미는 땟국 섞인 땀이 더 번들거려 보였다.
그런데 그런 상황을 악용하여 꼴사나운 장면을 연출하는 왈자들도 간혹 보였다. 창동 네거리 같은 데 나타나 ‘께에끼’하고 크게 외쳐 네댓 명이 죽어라 달려오면 양손을 주머니에 넣은 채 ‘장사 잘 되냐?’ 따위 말로 느물거리는 것이었다.
가까이 오다가 알아보고는 돌아서는 아이, 앞에 와서는 혀를 차는 아이들이 그러지 말라고 투덜거려도 매일 같이 그런 패들이 나타난다고 들었다.
그런 행태에 전염되었을까, 초등생쯤으로 보이는 몇몇 아이들은 ‘께에끼’하고 불러놓고는 아이들이 달려오면 골목길로 도망쳐버리는 일도 종종 목격되었다.
주로 빈농의 자녀들이거나 피난민, 귀환동포들의 자녀들인 그들은 그렇게 해 가면서도 운 없는 날엔 빈손으로 집으로 돌아간다는 사정도 들었다. 아니, 몇 개 못 팔고 아이스케키만 녹여버렸을 땐 빚만 남는 날도 있었다는 얘기를 우리 동네 움막에 살던 친구로부터 들었었다.
당시 마산엔 십여 개 이상의 아이스케키 제조공장(소규모 가내공장이 대부분)이 있었는데 이름난 메이커로는 구마산의 ‘밀림 아이스케키’와 신마산의 ‘맘보 아이스케키’가 유명했었다. 둘은 모양, 빛깔, 맛 등에서 아주 대조를 보였었는데 그래서 둘이 더 유명했었던 것 같다.
밀림은 지금 코아양과점 북쪽 맞은 편 경남은행 아래쪽에 있었는데, 팥을 넣었기에 초콜릿색이었고 단팥 맛이 아주 진하게 느껴져 입안이 달라붙는 느낌까지 받을 정도였다. 그래서 서너 개 이상 먹으면(창동, 오동동, 남성동 등지의 부잣집 아이들에게만 해당) 단맛으로 인한 역한 현상까지 느껴진다고들 했다.
정비석의 세태풍자소설 「자유부인」에 나오는 바람난 춤꾼들의 상징 ‘맘보춤’에서 따온 듯한 ‘맘보 아이스케키’는 그 이름이 풍기듯 맛도 아주 시원하고 향긋했다. 색깔도 연분홍과 연초록을 섞어놓은 것 같았다.
밀림이 앞지름 2.5㎝, 뒷지름 4㎝, 길이 20㎝ 정도의 동그란 막대형이었다면, 맘보는 두께 1,5㎝, 앞폭 4㎝, 뒷폭 6㎝, 길이 15㎝ 정도의 두꺼운 판자막대형이었다.
둘은 가격도 비쌌고, 봉암동 같은 농촌은 물론 변두리나 빈민들이 많은 동네에선 잘 볼 수도 없었다. 지금도 창동 황금당 옆에 있는 고급 빵집 ‘고려당’에서는 밀림과 맘보 두 아이스케키만 취급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군소의 싸구려 아이스케키들은(지금 돈으로 500원 정도였을 것이다) 변두리 동네나 농촌 등에서도 많이 볼 수 있었는데, 봉암동 서어나무 밑이나 봉선각 입구 등에서 매일같이 외치던 장사치들 중에서 밀림이나 맘보 소리는 한 번도 듣지 못했던 것 같다.
우리 동네에 오는 장사들은 주로 짐자전거에 싣고 다녔는데 리어카를 이용하는 사람도 있었고 간혹 지게에 통을 지고 오는 이도 있었다.
그들은 가까운데 있는 공장에서 받아 왔을 것이었다. 돈이 귀한 농촌이라 주로 곡식과 바꿔 갔는데 대부분 그걸 선호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바가지로 대충 퍼 주었기에 주로 장사들 쪽으로 후하게 가기 마련이었기 때문이다. 우리 동네에 다닌 장사들 대부분이 장정들이나 청년들이었는데 곡식 무게 때문이었던 것 같다.
진동이나 구산면 등지엔 그런 값싼 아이스케키도 없었기에 벌어진 해프닝도 화젯거리에 오르곤 했다.
우리 육촌형수가 구산면에서 시집왔었는데, 집에서 함께 산 아이스케키를 받아 논매러 간 남편이 돌아오면 주려고 등판(시렁의 사투리)에 얹어 두었다가 녹여 버리고는 훔쳐 먹은 사람 찾느라고 눈을 부릅떴던 일이 후일 내내 이야기 거리가 되기도 했다.<<<
박호철 / 창원미래연구소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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