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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 도시이야기

『진해』(1912) - 3. 시가지

by 운무허정도 2024. 12. 9.

3. 시가지

 

진해 일대의 지세는 이미 기술한 바와 같으나, 시가지 지형이 어떻게 생겼느냐 하면, 서북에서 동북에 걸쳐 산맥이 있고, 서남에는 재등만이 있으며 동북은 행암만을 바라보고 있다.

북광소로(北廣小路, 기타히로코지, 北辻, 기타츠지로도 불렸으며, 현 북원로터리를 가리키는 말)에서 관사 지역인 앵전통, 사쿠라다도오리)을 따라 원산(圓山, 円山, 마루야마, 진해공립심상고등학교가 있던 현 도천초 지역과 진해헌병분대의 나무가 울창했던 구릉지역을 가리킴)을 왼쪽으로 보면서 동남쪽으로 몇 정(町, 60間으로 약109미터를 말함)을 가면 진수부(鎭守府, 현 해군진해기지사령부를 말하는 것으로 진수부 설치가 예정되었음)부지에 도달한다.

진해 시가지 계획도

 

두산(兜山, 가부토야마, '투구모양처럼 생긴 산'이라는 의미에서 가부토야마로 불렀으며, 현 제황산을 이르는 말)은 시가지 동쪽에 솟아있고 남북을 갈라 산기슭에 가까운 중광소로(中廣小路, 나카히로코지, 처음에는 나카히로코지로 불리다가 이후에 나카츠지로 불림. 현 중원로터리를 말함)는 사통팔달의 요충에 해당한다.

정시천(征矢川, 소야가와, 현 여좌천)은 유명곡(有明谷, 아리아케다니, 지금의 여좌천(예전 이름은 한내, 혹은 대천으로 불림)하천수가 발원하는 골짜기)에 그 원천을 두며 시가지를 남북으로 관통하고 재등만에 흘러간다.

산과 바다 형세로 본다면 호주 시드니항을 빼고 세계 제일의 양항이라고 한다.

진해군항용 지역은 비봉(飛鳳)에서 행암만 끝머리에 이르는 연안 일대 및 그 전면에 위치한 섬 등을 합쳐 그 넓이가 1,312만여 평이 되고, 그 중에서 진해군항 설비지를 통칭해서 현동이라고 불러 왔는데 이는 단순히 경리부 앞 일부 좁은 지역을 가리키는 것이다.

시가지는 비봉에 2,700평 및 군항용 지역 동쪽에 인접해 재등만에 면하는 211,000평이 그것이며, 제1기에 36,000평, 제2기에 35,000평, 제3기에 140,000평 대하(貸下)를 실행한 것이다.

기타 들판은 경작지로 둔갑시켜 한일인(日鮮人, 군항에 인접한 시가지도 해군용지이며 군사상으로도 민간인이 소유할 수 없도록 되어 있었다. 단 이 시가지 구역에서의 대여는 일본인만이 그 대상으로 가능하며, 조선인은 누구 한사람도 대여신청을 할 수 없었다 (다케쿠니 도모야스 2019). 군항에 인접한 시가지에는 원칙적으로 조선인들이 살 수 없었음. 일부 시간이 지난 이후 창씨개명 등을 통한 조선인들이 살기도 했지만 초창기 군항건설 시기에는 조선인의 거주는 불가능한 상황이었음. 원저에는 한일인(人)으로 명시되어 있어 해당 내용을 직역하였으나, 해당 시가지 구역에서는 일본인만을 대상으로 하여 대부했을 것으로 추정됨)에 대부해, 또한 북방 일대 산림지역이면서 한인시가지 경화동 배후에 있는 100만여 평은 상응할 값으로 대부(貸付)하기로 되어 있다.

시가지 대하 제1기, 제2기는 똑같이 해군에서 직접 대하를 실시했던 바, 제3기만은 진해학교조합의 기본 재산으로 삼아 해군에서 30년 동안 무상대부(아무런 대가 없이 남에게 빌려줌)된 것을 동 학교조합이 25년 기간으로 민간에 전대할 수 있게 만든 것이다. 이것으로 우선 시가지 대하작업은 전부 완료한 셈으로 되어 있다.<<<

 

이 글은 2022년 창원시정연구원이 1910년대와 20년대 진해의 모습을 담은 세 권의 책을 번역하여 하나로 묶어 낸 지역사발굴연구 교양총서 3권 『근대 문헌 속 진해』 중 『진해』 부분이다. 1912년 출간되었으며 저자는 스기야마 만타(杉山萬太)이다. 본 포스팅은 비영리를 전제로 창원시정연구원의 양해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