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도시이야기632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55) - 개항이후 1910년 경 마산포에서 가장 번화했던 곳은 어디일까요? 복원도에 나타나는 1,157필지를 각각 그 사정토지대장을 확인해 각 토지를 등급에 따라 구분하여 그 결과를 그림으로 나타내 당시 도시상황을 확인하였습니다. 토지과세가격과 비교하여 토지등급으로 지가(地價)를 분류해도 오류가 없음을 확인하였습니다. 다음 그림은 남성동(당시 元町) 1번지의 사정토지대장입니다. 노란색 원 안에 등급이라는 표기가 되어있는데 등급이 몇 차례 바뀐 흔적이 있습니다. 복원도의 땅 1,157필지는 최저 17등급에서 최고 77등급까지 분포되어 있었습니다. 이를 모두 여섯 단계로 구분하여 그림으로 나타내 보았습니다. 색깔이 짙을수록 비싼 땅, 번화했던 곳이었습니다. 그림을 보면 마산창을 중심으로 서굴강과 동굴강을 감싸고 있는 남성동 .. 2011. 4. 25.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54) - 개항이후 1910년 경, 일본인들은 마산포의 땅을 얼마나 차지했을까? 사실을 알기 위해 복원도에 나타난 모든 땅의 소유관계를 사정토지대장으로 확인해보았습니다. 아래 그림에서 붉은 색 표기를 한 토지가 당시 일본인들이 소유하고 있던 부지입니다. 한일병합 직후에 한국인들의 오랜 터전이었던 마산포에 일본인들이 이처럼 많은 땅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 놀랍습니다. 기존의 여러 문헌에서는 '비록 일본인들이 신마산은 차지했으나 주민들의 반일의식 때문에 마산포에는 쉽게 진출하지 못했다'라고 되어 있습니다만 위 도면을 보면 이런 주장들에 의구심이 생깁니다. 마산포 주민들의 반일의식과 달리 마산포 요지에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던 사람들 중 적지 않은 분들이 일본인들에게 토지를 매도하여 결과적으로 일본인의 원마산 진출을 가능하게 하였.. 2011. 4. 18.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53) - 개항이후 마산포가 조선시대 번성했던 포구라고 알려져 있지만 옛 마산포의 해안선이 현재 도시 속 어디였는지 정확하게 밝힌 적은 없었습니다. 시사(市史)를 비롯한 몇몇 자료에서 대충 언급했지만 추측일 뿐이었습니다. 오늘 포스팅에서 밝히는 마산포 해안선(海岸線)은 사정지적도(査正地籍圖)와 그 외의 여러 자료들을 통해 확인한 것입니다. 저는 정확(?)하다고 봅니다만 땅을 파보지 않아서 장담은 못하겠습니다. 마산포에는 일찍이 두 개의 굴강과 네 개의 선창이 있었습니다. 동굴강과 서굴강으로 불렸던 두 굴강에 대해서는 1964년 『마산시사 사료집 제1집』의 「마산축항지」에서 김준이 그 용도를 다음과 같이 말한바 있습니다. 「서굴강(西掘江)은 인공(人工)으로 구축된 듯한 방축(防築)이며 여러 파도를 막고 범선(帆船)들이 정박하.. 2011. 4. 11.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52) - 개항이후 -마산포의 길- 포구를 끼고 발생한 마을의 경우, 마을 규모가 작을 때는 한 개의 선창을 중심으로 단순하지만 마을 규모가 클 때는 몇 개의 선창을 연결하는 주도로를 중심으로 여러 갈래의 길들이 형성됩니다. 마산포의 경우는 후자처럼 창원가도(昌原街道)를 중심으로 수계(水系)와 능선 그리고 등고선에 따라 자연발생적으로 형성된 얼개를 갖추고 있었습니다. 지난 회에 올렸지만 다시 한 번 마산포 복원도를 보겠습니다. 남성동 파출소 일대, 즉 조창지 부근지역은 조창과 관련한 관리들 거주지 혹은 조창관련 건물들 탓에 계획된 도로로 보이는 직교격자형이 많았습니다. 이 지역은 한일병합 이후 근대식도로가 개설되면서 금융 등을 비롯한 새로운 산업시설을 담당하는 마산포의 중심공간으로 변하게 됩니다. 이와 달리 인구 증가와 함.. 2011. 4. 4.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51) - 개항이후 지금부터 소개할 마산포 복원도는 1905년-1910년 시기의 마산포 도시상황입니다. 하지만 시기적으로 보아 이때 상황이 19세기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어서 이 복원을 ‘조선후기의 마산포 복원도’라고 해도 큰 문제는 없을 것 같습니다. -복원도 작성 범위- 복원작업의 범위는 토지의 지목과 형상을 분석하여 주거용지로 사용되었을법한 토지들이 일정한 형태로 집합되어있는 영역으로 결정하였으며, 외곽경계는 가급적 도로로 하였습니다. 설정된 범위는 다른 자료에 나타나는 당시 원마산의 주거용지 경계와 비교하면서 조정하였습니다. 이 과정에서 지적도에서 복원한 당시 주거지 영역과 다른 자료에 나타나는 주거지 영역이 거의 일치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복원도 작성 방법- 복원방법은 제가 임의로 착안하였습니다. .. 2011. 3. 28.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50) - 개항이후 지적학자 리진호에 따르면 우리나라 최초의 지적도는 1908년 탁지부 임시재산정리국 측량과 명의로 발행된 서울의 지적도입니다. 하지만 이 지적도는 명목상으로 남아있던 대한제국 탁지부의 첫 시도라는 의미만 있을 뿐, 전국토를 정식으로 도면화 시킨 최초의 지적도는 1912년 일제가 제작하였습니다. 토지의 소유관계를 조사하고 심사하여 확정지었다는 의미에서 이 지적도를 사정지적도(査定地籍圖), 함께 제작된 토지대장은 사정토지대장(査定土地臺帳)이라고 부릅니다. 일제기 마산에 살았던 일본지식인 추방사랑(諏方史郞)의 『마산항지』에 의하면 마산에서 토지조사가 시작된 것은 1909년이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마산의 사정지적도(査定地籍圖)는 착수 후 3년이라는 제작시간을 거쳤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지적도 제작과정에 .. 2011. 3. 21.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49) - 개항이후 오늘부터 마산포(원마산)의 옛 모습에 대해 7회로 나누어 포스팅하겠습니다. 근대적인 계획도시였던 신마산과 자연발생적으로 형성된 전통도시 원마산의 사정은 사뭇 달랐습니다. 당시 마산포(원마산)의 규모입니다. 1900년-1910년 경 마산포는 인가(人家)가 조밀하고 상점이 번화했으며 2,000여 호의 재래식 건물들이 들어서 있었습니다. 상점가는 주로 해변에 면해 있었습니다. 마산포의 중심부인 현 제일은행 마산지점 자리에는 정사각형의 1,500여 평의 부지에 150여 년 동안 존속해 온 마산창이 개항과 함께 감리서아문(監理署衙門)으로 변해 자리를 잡고 있었습니다. 마산창은 100여년 전까지 존재했던 건물로서 규모․위상․역사성이란 측면에서 가장 상위의 관아였습니다. 마산창에 대해서는 에서 이미 소개하였습니다. .. 2011. 3. 14.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48) - 개항이후 지난 주 포스팅한 내용처럼 마산포 6개리의 명칭이 일본식으로 바뀔 때, 6개리의 경계가 새롭게 획정되었습니다. 여러 자료를 통해 추적한 결과입니다. 이 글에서는 일본인들에 의해 변경되기 전 6개리의 경계를 복원해보겠습니다. 정확하지는 않더라도 마산이라는 근대 도시를 탄생시킨 「조선시대 마산포 6개리 추적」 그 자체에 의미를 두고 쓰는 글입니다. 마산포라는 지명은 고려후기 혹은 그 이전부터 사용되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하지만 마산포를 도시로 만든 맹아는 1760년 마산창 설치 후 발생한 6개리(里)였습니다. 동성리․서성리․중성리․성호리․오산리․성산리의 마산포 여섯 리(里)가 최초로 나타나는 지도는 마산포가 개항된 1899년에 간행된 창원읍지에 수록된 지도입니다. 관찬과 사찬을 통틀어 지금까지 행해진 마산연구.. 2011. 3. 7.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47) - 개항이후 일제는 그들의 편의에 따라 도시지역의 행정구역 최소단위를 ‘정(町, 마찌)’이라는 일본식 명칭으로 바꾸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마산창(馬山倉) 설치 후 생겼던 마산포의 6개리도 명칭이 바뀌었습니다. 이 글은 마산의 행정구역 명칭이 바뀌는 과정과 결과에 대한 내용입니다. 조선총독부를 개청한 1910년 10월 1일 하루 전날인 9월 30일, 일제는 식민지 통치를 위한 과도기적 지방통치기구를 확립하였는데 거기에 동리명의 변경에 관한 지침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변경방법은 그 때까지 사용되던 행정구역의 최소단위인 ‘동’과 ‘리’의 명칭을 일본식이나 한국식 중 어느 것이나 택하라는 식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미 일본인이 행정책임자가 되어 있었을 뿐만 아니라 온통 일본 세상이었던 때라 종래의 한식(韓式) 동리명이 채택되.. 2011. 2. 28.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46) - 개항이후 1909년 일본 육군중포병대대가 월영동(구 국군통합병원자리, 현 월영동 아파트 단지)으로 오면서 진입 도로 일부와 대대가 끼고 있던 자복포 일부를 매립하여 연병장으로 사용하였습니다. 창원으로 떠난 한국철강 터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한국철강 터 중 안쪽(월영동 아파트 단지 쪽)입니다. 아래 그림은 1912-1914년 경에 제작된 지도입니다. 중앙하부에 직선으로 그려 놓은 기역자 형 토지 내 ‘연병장(練兵場, 둥근 점)’이라고 적혀 있는 곳이 매립지입니다. 이 자리에 부대가 들어선 것이 1909년이고, 주위에 연병장 둘만한 곳이 없는 것으로 미루어 부대 이전 직후 간석지를 매립해 연병장을 조성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진입도로 쪽 일부(사각 점)도 매립한 흔적을 알 수 있습니다. 1899년 제작된 매립 전 지도.. 2011. 2. 21.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45) - 개항이후 각국공동조계지를 건설할 때, 해안선의 경계는 해수의 간조선과 만조선을 고려하여 결정하였습니다. 그러나 조계지의 북단과 남단은 만조선이 깊어서 매립을 한 후 호안공사를 했으며, 중앙부 세관지역을 비롯한 호안선은 전부 매립이 있었다고 추정됩니다. 아래 두 그림을 비교해 보면 매립여부가 잘 나타납니다. 노란선은 현재 시내버스가 다니는 간선도로인데 그림의 비교를 위해 그었습니다. 이 지도는 1899년 마산개항 때 각국조계장정에 첨부되었던 것입니다. 전체 조계지 중에서 1차로 조성할 부분이 표기되어 있는데, 마침 간조선(Low Water Line)과 만조선(High Water Line)이 표기되어 있어서 매립여부를 판단하는데 큰 도움이 됩니다. 다음 그림은 1916년 일본 육지측량부가 제작해서 발행한 같은 지역의.. 2011. 2. 14.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44) - 개항이후 - 앞에서 포스팅한 '계획만으로 끝난 다섯 번의 매립시도' 와 달리 지금부터는 실제로 시행된 매립공사를 소개합니다 - 지금도 마산만의 매립 때문에 지역사회가 갈등하고 있습니다. 마산해양신도시 건설용 34만 평 매립 계획의 원안추진과 백지화를 두고 시민들의 찬반이 팽팽하고, 매립으로 조성된 가포신항부지의 용도변경문제에도 의견이 분분합니다. 100년 넘게 지속된 마산만 매립, 그 최초의 것을 소개하겠습니다. 불행하게도 마산만은 첫 매립부터 마산포 주민들의 의사와 아무 상관 없이 진행되었습니다. 마산만 첫 매립은 한반도 지배를 꿈꾸며 승승장구하던 일제의 군부가 저질렀습니다. 1904년-1905년 마산과 삼랑진을 잇는 철도 마산선의 출발점인 마산역 부지를 조성하기 위한 매립이었습니다. 원래 이 철도는 한국인이 .. 2011. 2. 7.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43) - 개항이후 1) 신마산 수산시장 매립계획 1905년 7월 29일 창원감리 현학표는 외부대신 이하영에게 매립신청을 했습니다. 위치는 마산포의 각국공동조계지 밖 남쪽 해안이었고, 그 절차로 신동공사에 청원을 심의해 달라는 요청이었습니다. ‘창원감리 보고 제50호’로 제출되었으며 도면까지 첨부되었습니다. 아래 그림이 당시에 첨부되었던 도면입니다. 위 도면의 좌하부 삼각형 부분이 매립신청지인데 '수산회사축정지, 5천㎡정계(定界)'라고 적혀있습니다. 이 그림의 삼각형 매립계획지를 현재 위성지도에 표기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연두색 삼각형이 수산시장 매립계획지, 노란색은 각국공동조계지, 파란색은 당시의 간조시 해안선입니다) 이 매립은 일본인 10여 명이 수산회사를 설립하여 신마산에 수산시장을 건립하겠다는 목적이었으며 위치는 .. 2011. 1. 31.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42) - 개항이후 1) 김경덕의 매립 계획 개항이 되면서 외국상선들이 마산포에 드나들기 시작했습니다. 외국군함들도 가끔 들어왔습니다. 외국 선박들이 들어오는 날이면 공물상인들과 잡화상들이 서부경남 각지에서 마산포로 몰려들어 북새통을 이루었으며 선창가에는 화물이 넘쳐났습니다. 하지만 당시 마산항의 규모와 시설은 이러한 상황을 충분히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오산선창․어선창․백일세선창․서성선창의 네 개 선창과 동․서 두 개의 굴강이 있었지만 모두 수심이 얕아 선박접근이 쉽지 않았고 하역장소도 좁았습니다. 선착장도 자연적 지형을 이용한 초보적인 시설뿐이었습니다. 늘어가는 항만 물량을 도저히 수용할 조건이 되지 못했습니다. 이때 동성리에 거주하던 김경덕이라는 사람이 마산포 앞에 매립을 하겠다고 나섰습니다. 마산포 개항 5개월 후인.. 2011. 1. 24.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41) - 개항이후 마산도시변천사는 매립의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매립은 마산의 도시규모를 키웠고 교통과 산업에도 큰 영향을 미쳤으며 때로는 도시중심권을 이동시키기도 했습니다. 매립이 지도만 바꾼 것이 아니라 마산시민의 생활까지 바꾸었습니다. 특히 근대도시 형성기였던 일제강점기의 매립은 마산도시구조에 결정적인 영향을 키쳤습니다. 그러므로 마산만 매립에 대한 이해 없이는 마산도시변천과정을 제대로 알기 어렵습니다. 일찍부터 마산이 항만으로서 가치를 인정받은 이유는 마산만 주변을 둘러싼 자연조건, 즉 내륙 깊숙이 들어온 마산만의 위치와 피항에 적합한 지형 때문입니다. 멀리 고려시대 조창인 석두창(石頭倉)과 일본정벌을 꿈꾸었던 정동행성, 그리고 조선시대 마산창(馬山倉)에 이르기까지 왕조시대 조정에서 마산항을 중시한 까닭도 .. 2011. 1. 17.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40) - 개항이후 -마산전도**- 1908 / 통감부철도관리국 / 좌동 / / 한국철도선로안내 / 경남대학교 도서관 마산에는 일찍부터(1905년) 철도가 놓였기 때문에 철도를 소개하는 모든 자료에 마산이 수록되어있습니다. 이 지도도 그런 종류 중 하나입니다. 조잡하게 제작되었지만 당시의 도시상황을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는 유익한 자료입니다. 특히 신마산과 원마산의 합방 전 도로 사정을 잘 알 수 있기 때문에 지금까지의 마산역사 연구에서 많이 인용되었던 자료입니다. 장군동 일대의 소위 중앙마산(구 마산시청 일대)에 오랫동안 존재했던 '철도용지'가 이 지도에 글로 표기되어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이 지도가 제작된 1908년에는 계획단계에 머물러 있었던 고지대(현, 문화동 일대)에 까지 도로가 그려져 있으며 조금 과장된 면도 .. 2011. 1. 10.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39) - 개항이후 -마산전도(馬山全圖)*- 1907년 / 청목항삼랑(靑木恒三郞) / 율원경포당(栗原耕浦堂) / 1 : 4,500 / / 일본국회도서관 한일병합 직전 시기의 신마산 조계지를 가장 정확하게 알 수 있는 자료입니다. 제목인「마산전도」에서 보듯이, 당시 일본인들은 자신들이 살았던 지역을 ‘신마산’ 혹은 그냥 ‘마산’이라고 불렀으며 원래부터 한국사람들이 살았던 원마산(마산포)을 ‘구마산’이라 불렀던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일본인에 의해 마산 최초로 개설된 중앙에 있는 도로를 진해본통(鎭海本通)으로 표기하는 등 도로의 명칭을 일본식으로 지어 사용하고 있으며 조계지 주변의 산 이름까지 일화산(日和山), 영성둔산(影星屯山) 등 그들 멋대로 지어서 사용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본 지도가 제작된 시기에는 아직 개설되지.. 2011. 1. 3.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38) - 개항이후 -한국마산포 대일본제국 전관거류지 평면도- 1902년 5월 / 일본정부 / 한일양국정부 / 막대축척 / 마산포일본전관거류지협정서 / 규장각 마산의 일본전관거류지가 확정된 후 그 협정서에 첨부된 지도입니다. 자복포, 즉 구 한국철강 주변 일대가 상세하게 측량하여 표시되어 있습니다. 35회에 포스팅한 일본의 육군중포병대대(현재의 월영동 아파트 단지, 구 국군통합병원)가 옮겨오기 전의 자복포 일대를 세밀히 알 수 있는 유일한 자료입니다. 지금은 완전히 사라져 버린 자복포의 해안선이 상세히 나와 있을 뿐아니라, 범례를 만들어 도로, 가옥, 구거, 묘지 등까지 잘 표시되어 있어서 당시의 상황을 정확하게 알 수 있습니다. 월영리에서 율구미로 이어지는 옛길도 세밀하게 표시되어 있습니다. 토지의 소유도 러시아인소유지,.. 2010. 12. 27.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37) - 개항이후 -마산포부근 지도- 1902년 / 향월원태랑 / 동경 청목숭산당 / / 한국안내 제8편 마산포안내 / 서울대중앙도서관 과문한 탓인지 모르지만 이 지도가 실려있는 책『한국안내』는 일본인이 편찬한 마산관련 문헌 중 최초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 지도는 책의 부록에 첨부된 것이라 상세하지는 않습니다만 개항 초기 마산만 주변의 상황은 어느 정도 알 수 있도록 표기되어 있습니다. 지도에는「마산포 사건」으로 유명한 율구미(栗九味)의 노국전관거류지(露國專管居留地)와 자복포의 일본전관거류지(日本專管居留地)가 점선으로 표기되어 있어서, 20세기 초 마산포를 먹으려 혈안이었던 러시아와 일본의 각축을 짐작케 해줍니다. 도시지역에 대한 상세한 표기는 없고, 각국거류지와 마산포와 구(舊) 성적(城跡, 현 용마산에 위치한 산.. 2010. 12. 20.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36) - 개항이후 개항이후부터 1910년 이전의 시기에 제작된 마산지도를 소개하겠습니다. 지도의 기본정보 표기는 개항기 때와 같습니다. 는 지도의 제목이며 제목 아래에 표기한 것이 지도의 기본 정보입니다. 표기 순서는「제작연도 / 제작자 / 발행처 / 축척 / 수록처 / 소장처」순입니다. 기록이 불가능한 부분은 해당 칸을 비워「/ /」로 표기하는데 지도제목이 동일한 경우에는 지도명칭 뒤에「*, **, ***」를 붙여 구분하겠습니다. -조계지현황도**- 1900년 / / / 마산포사건 관련 일본 해군대신관방서류(秘) / 미의회도서관(11)NT(C)NO.178 지도의 명칭은 원래 없었습니다. 「馬山機密本第八六號附屬 (마산기밀본 제86호 부속)」이라고 적혀 있을 뿐이었는데 지도의 내용을 참고하여 제가 임의로 지도의 명칭을 붙였.. 2010. 12. 13.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35) - 개항이후 일본 신사(神社)가 우리 민족을 정신적으로 위압했다면, 물리력으로 우리를 억누른 것은 일본의 군대와 경찰이었습니다. 일본군대의 마산진출은 1905년 마산선 철도가 건설될 때 쯤 시작되었습니다. 하지만 본격적인 진출은 1909년 7월 일본육군의 중포병대대(重砲兵大隊)가 진해에서 마산 월영동(현 월영동아파트단지)로 이전한 것과 같은 해 12월 대구헌병분유소(大邱憲兵分遺所)을 신마산에 설립한 일입니다. 이 글은 월영동에 주둔했던 「육군중포병대대」에 대한 내용입니다. 러시아와의 각축기에 일제는 율구미와 자복포 일대(현, 월영동 아파트 단지 및 구 한국철강 부근 일대)를 그들의 전관거류지로 확정했다가 1905년 러일전쟁이 끝나고 을사조약이 체결될 즈음 이 지역은 군용지로 바뀌었습니다. 그러다가 1908년부터 본격.. 2010. 12. 6.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34) - 개항이후 일제가 우리 민족을 무력으로 위협한 것이 군대와 경찰이었다면 정신적으로 위압한 것이 신사(神社)였습니다. 한반도에 가장 먼저 들어온 일본신사는 부산신사인데 이미 17세기에 일본인들이 부산에 상주하면서 세워졌다고 합니다. 그 후 1876년 한일수호조약(강화도조약)이 체결된 후 개항된 도시에 각국공동조계지가 설치되면서 일본거류민들이 조계지에 신사를 세웠습니다. 마산의 일본 신사(神社)건립계획은 순종이 마산을 방문했을 때 쯤 (1909년 초) 홍청삼(弘淸三)에 의해 주도되었습니다. 그 이전부터 마산경제회 등 일본인 유지들이 모인 자리에서 여러 차례 신사의 필요성이 제기되었지만 아무도 그 일을 맡아서 하는 사람이 없었는데, 어느 날 홍씨가 마산의 일본인 유지 27명을 요정 ‘망월’에 초대하여 신사 창건을 호소하.. 2010. 11. 29.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33) - 개항이후 조선의 마지막 왕 순종은 즉위 후 몇 차례에 걸쳐 지방 순행에 나섰습니다. 순종의 남부지방 순행은 1909년 1월 7일부터 13일까지 6박 7일간이었습니다. 마산 순행 일정에 대한 『승정원일기』순종 3년 1월 5일자 기록입니다. 「…… 9일에는 부산에 머무르고, 10일 오전 9시에 부산정거장에서 기차로 출발하여 11시 25분에 마산에 도착, 하룻밤을 유숙한다. 11일에는 마산에 머무르고, 12일 오전 8시 40분에 마산 정거장에서 기차로 출발하여 11시 45분에 대구에 도착, 하룻밤을 유숙한다」 원래 통치자의 순행은 지방의 사정을 감찰하고 백성의 고통을 살피는 데 그 일차적인 목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통감 이토 히로부미를 비롯한 내각과 통감부 관원들을 대거 수행하고 순행에 나선 것은 순종의 권위와 권력을.. 2010. 11. 22.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32) - 개항이후 개항 당시 각국거류지에는 러·일 영사관 건물 외에 러시아와 일본 민간인의 건물 몇 채만 있었을 뿐, 일본인 대부분은 한인거주지인 마산포에 살고 있었습니다. 아래 사진은 1899년에 건축한 러시아 영사관 건물입니다. 마산이사청과 함께 지은 마산 최초의 2층 건물로 조계지 언덕에 걸터 앉은 모습이 위용 당당합니다. 경남대 평생교육원(구 창원군청) 옆에 있었습니다. 조계지 내에서 경제활동을 했던 러시아인들은 조계지내의 대지주이면서 무역업과 러시아군함에 대한 잡화용달업을 하였습니다. 그들은 함석이나 기와로 된 주택을 직접 지어 살았습니다. 1900년 연말 현재 조계지 내 러시아인 건물은 모두 6동이었으며 그 중 한 채는 건평 80평으로 호텔업을 목적으로 건축 중이었는데 조계지에서 가장 규모가 컸고 위치는 조계지.. 2010. 11. 15.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31) - 개항이후 마산 최초로 근대식 학교가 섰습니다. 창원군에 있던 소학교가 마산으로 이전하면서 개설한 공립소학교로, 현재의 성호초등학교입니다. 1901년 4월에 개교하였으며 한국인들이 다녔습니다. 마산공립소학교는 1904년에 지방 유지들의 성금 2,000여원으로 교사(校舍)를 지었고 1911년 마산공립보통학교로 교명이 바뀌었습니다. 아쉽게도 1904년에 지은 교사의 사진은 남아있지 않습니다. 아래 사진은 1927년에 벽돌조 2층으로 지은 교사입니다. 일본인을 위한 최초의 정식 교육기관은 마산심상소학교(현 월영초등학교)입니다. 1902년 11월 조계지 내 남쪽 끝 해안의 한옥을 한 채 빌려 일본불교 정토종 개교사(開敎師) 삼우전지문사(三隅田持門師)가 마산포일본인소학교를 세웠는데 1904년 6월 마산심상소학교가 설립되자 .. 2010. 11. 8.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30) - 개항이후 개항 후 일본인들이 들어오면서 마산에도 근대산업의 문이 열렸습니다. 무역이 본격화되었고, 금융업과 건설업이 선을 보였습니다. 마산의 대표적인 산업이었던 장유업도 이 때 시작되었습니다. ○ 항만 『110년 전인 1900년, 마산항의 무역량은 수입 154,765엔, 수출 87,024엔으로 수입액이 수출액보다 두 배 가량 많았다. 쌀․콩․동광(銅鑛)․사금(砂金)․소가죽․소금 등을 수출하였고 방적사(紡績絲)․옥양목․석유․솜․명태․누룩․성냥․철제품 등 생활용품이 마산항을 통해 들어왔다. 그 중 일부 수입품은 칠원․진주 이북 지방뿐만 아니라 전라도 상인들까지 마산포에 와서 일본에서 수입한 소비품들을 사갔다』 이 글은 1902년 일본인 향월원태랑(香月源太郞)이 1발간한 『한국안내』에 실린 기록입니다. 『한국안내』는 .. 2010. 11. 1.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29) - 개항이후 개항 이후 하루가 다르게 밀려오는 외국자본의 경제 침식에 맞서 지역 상권을 지키려는 노력이 있었습니다. 전국개항장의 객주와 여각 등 상인들이 자위적으로 상인 단체들을 조직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조선 정부는 갑오개혁 이후 자연발생적으로 생긴 이러한 조직체를 통괄하여 외세로부터 민족 상권을 옹호하기 위한 목적으로 1895년 11월 10일「상무회의소 규례」를 제정하였습니다. 이 규례가 우리나라에서 제정된 근대적 상공회의소에 관한 최초의 법령입니다. 대한제국기인 1899년 5월 12일에는 칙령 제19호로 전 조항을 개정했는데 이로써 근대적 면모를 갖춘 상무회의소가 설립되기 시작했습니다. 이 날을 기념해 정부에서는 1962년부터 이 개정규례가 발포된 5월 12일을「상공의 날」로 정해 지금까지 기념하고 있습니다... 2010. 10. 25.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28) - 개항이후 마산에 최초로 일본군대가 들어온 것은 이 도시에 철도가 놓일 때였습니다. 러일전쟁에 앞서 일본은 마산에 있는 우체국과 전보사 및 율구미에 있던 러시아 해군육상사령부의 시설을 압수했고, 한일의정서 체결(1904. 2. 23) 후부터는 마산항에 일본군과 군수물자를 실은 군함이 무시로 드나들었습니다. 1904년 9월 1일에는 군용철도 마산선을 놓기 위해 일본군 건설공작대가 마산만을 통해 입항했습니다. 마산에 들어온 일본군은 철도용지 명목으로 마산포 주민들의 토지를 아무런 보상도 없이 압수하는 폭거를 저질렀습니다. 마산 뿐아니라 전국적인 일이었습니다. 경계 측량을 할 때 경계를 속인다든지, 원래 정해진 경계보다 턱없이 많게 토지를 점령한다든지, 군용지라고 속여 민간의 토지를 침범한다든지, 일본군의 군용도로를 만.. 2010. 10. 18.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27) - 개항이후 일본군이 이 땅에 주둔하기 시작한 것은 1882년 임오군란 직후였습니다만 일본 민간인이 공식적으로 서울에 들어온 것은 1884년에 착수한 그들의 공사관(公使館) 신축 때 들어 온 직공(職工) 70여명이 최초입니다. 그 전에는 비공식적으로 상인 약간 명이 잠주(潛住)하고 있었을 뿐이었습니다. 하지만 본격적으로 일본인들이 거주하기 시작한 것은 남산 밑에 일본인 거류구역이 설정된 1885년 후였습니다. 이로부터 10여 년 후인 1894년, 일본 정부는 한반도 지배를 위해서 일본인의 한국 이주가 중요하다고 판단하고 다음과 같이 입장을 정리합니다. 일본인으로 하여금 되도록 속히 한국 땅에 이식시키는 일, 이것은 참으로 영원한 계책이다. 한국 땅 이식 사업은 한반도를 개척하는 데 무엇보다도 장기적 대책이다. 한국 .. 2010. 10. 11.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26) - 개항이후 1876년 최초의 개항이후 1910년 일제에 의해 완전 강점당할 때까지 34년간은 이 땅 안의 모든 기존 질서가 파괴되고 새로운 질서로 재편성되는 시기였습니다. 이 재편 과정에서 신도시(新都市)가 생겨나기도 하고 반대로 많은 전통적 도시들이 상대적 또는 절대적인 쇠퇴의 길을 걸었습니다. 전자는 마산을 비롯한 개항장 소재지들로서 외국인거류민들을 중심으로 통상 무역이 활발히 전개되던 신도시들이었고 후자는 지방행정의 중심으로서 1,000여 년의 전통을 이어받은 전래의 도시들이었습니다. 전자에 속하는 도시 중에서 마산․인천․군산․목포․부산․진남포․신의주․원산․청진 등의 9개 도시와 후자에 속하는 도시 중에서 경성․대구․평양의 세 도시가 1914년 부(府, 현재의 시)로 바뀝니다. 개항 이후 국제 사회에서 한국 .. 2010. 10. 4. 이전 1 ··· 17 18 19 20 21 22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