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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도시이야기

아, 촉석루

by 운무허정도 2024. 9. 5.

이 글은 9월 3일 경남도민일보에 게재된 칼럼입니다.

 

진주 사람 영의정 하륜은 '누는 용두사 남쪽 돌벼랑 위에 있는데 소년 시절 여러 번 올랐던 곳이다. 규모가 크고 높으며 앞이 확 트였다. 굽어보면 밑으로 긴 강이 흐르고, 그 바깥에 여러 봉우리가 펼쳐져 있다'고 했다.

집현전 직학사였던 김구경은 '누각에 올라 한참을 머무니 풍경이 나를 흔들어 시 짓고 싶어진다'고 했다.

그렇다. 촉석루는 빼어나면서도 주변과 조화롭고, 웅대하면서도 앉은 자태가 사뿐하다. 시문이 절로 나올만하다.

그 까닭에 1241년 창건된 후 지금까지 이 나라 누각의 상징이었고, 수많은 시인 묵객들의 시재가 되었다.

강 가운데 돌들이 뾰족이 솟은 까닭에 이름을 촉석(矗石)이라 했다. 평양 부벽루, 밀양 영남루와 함께 한국 3대 누각으로 꼽히며, '해동제일루'라는 별칭도 가졌다.

진주성 군사를 지휘한 남장대였지만 평화로운 시절에는 과거장으로 쓰여 장원루라고도 불렀다.

 

말 못하는 건축물이지만 서린 한이 깊다.

1379년 고려 말, 남해안에 창궐했던 왜구들이 불태웠던 것을 진주 사람들이 비용을 모아 1413년 중건했다.

임란 때의 영욕은 깊고도 크다.

한산대첩, 행주대첩과 함께 '임란 3대첩'인 진주대첩지이다.

1592년 10월 일본군 2만의 공격을 4000명도 못 되는 군사로 6일간 싸워 물리쳤다.

하지만, 다음 해 6월 재침 때는 군관민이 피로써 싸웠지만 지키지 못했다. 마지막 순간에 장수들은 촉석루에 모여 결의한 뒤 끝까지 싸우다 죽거나 자결했다. 의기 논개가 왜장을 끌어안고 남강에 투신한 것은 패전 직후였다.

임란 중에 파괴된 촉석루는 1618년 광해군 재위 때 중건했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자 촉석루는 국보로 지정되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깐, 1950년 한국 전쟁 때 또다시 불에 타 국보에서 해제됐다. 지금의 촉석루는 1960년 진주시민의 성금으로 복원한 것이다.

당대를 대표했던 대궐목수 임배근이 공사 책임을 맡았다. 1960년대 남대문 보수공사를 도면 없이 완벽히 복원했다는 대목장이다. 촉석루 재건공사 후 임배근 대목장은 "이승에 장인으로 태어나 이런 일을 한 번 하고 가기는 드문 일"이라며 적이 만족해했다.

촉석루는 복원되어 돌아왔지만 '국보' 지위는 돌려받지 못했다. 원형과 다르다는 것이 이유였다.

그사이 경남의 이름 높은 건축들이 국보로 등재됐다.

1962년 합천 해인사 장경판전, 1997년 양산 통도사 대웅전, 2002년에는 삼도수군통제사의 객사였던 통영 세병관이 국보로 지정됐다. 작년에는 촉석루를 본떠 지은 영남루도 국보로 승격돼, 경남의 내로라하는 건축 네 곳이 '국보'로 나라의 관리를 받고 있다.

국보는 보물에 해당하는 문화유산 중 인류문화 관점에서 가치가 크고 유례가 드문 것을 정부가 지정한다.

이런 중 7월 좋은 일이 생겼다. 경남연구원이 지금의 촉석루 복원 당시 자료를 발굴했다.

소실 이전인 1937년 촉석루 실측도 넉 장, 복구공사를 위해 1957년 작성한 설계도 다섯 장, 원형대로 복구하라는 대통령 특별지시 공문서와 그에 대한 언론보도 등을 찾아낸 것이다.

발굴 자료 분석 결과 현 촉석루 구조와 규모가 대부분 원형과 일치함이 확인됐다. 선량과 연구자가 애쓴 결과다.

창건 783년, 소실 뒤 중건한 지 64년이 지났다.

진주 남강 남쪽 돌벼랑 위에서 민족과 영욕을 함께했던 촉석루에 '국보'의 명예를 헌정하자는 목소리가 높다.

옳은 일이다.

그것이 촉석루에 대한 우리의 도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