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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 도시이야기634

김형윤의 <마산야화> - 14. B29의 맹위, 15. 학병의 출진 14. B29의 맹위 그라만 함재기가 수십편대로 동경 천지를 저공으로 전주 사이를 날아다니며 곡예식으로 맹습한 것은 일본이 진주만을 암타(暗打)한 131일만인 1942년 4월 18일인데, 그로부터 오랜 침묵을 지켜오던 연합군 측의 소위 대공의 요새라는 B29기가 행동을 개시한 것은 1940년으로서 중국 성도에서 이륙, 마산의 무학산정을 거쳐 천자봉을 경과, 일로(一路) 일본 본토를 진공하였는데 처음 마산 상공에 나타난 것은 한여름 오후 9시경. 어스름 달밤에 가는 비가 내렸다. 이로부터 한반도 상공으로 B29기가 통과하지 않는 때가 없었다. 이것들이 통과하고 나면 일본 각 도시는 소이탄(燒夷彈)과 폭격으로 날로 초토와 폐허가 되어가고 있었다. 한국은 무사했느냐 하면 그렇지 않아 다소의 피해가 있었으니 마.. 2015. 5. 11.
김형윤의 <마산야화> - 12. 중학교유의 익사 13. 민족의 제전 상영금지 12. 중학교유(中學敎諭)의 익사 마산 공설해수욕장은 원산의 명사십리에 못지 않는 곳이다. 물결이 잔잔하면서 차지 않고 멀리까지 얕았으며 깔려있는 모래가 깨끗하고 해변은 철도공지에 창창한 송립이 쭉 늘어져서 문자 그대로 백사청송(白沙靑松)의 경치였던 것이다. 매년 7월 13일에 개장이 되면 각 지방의 피서객과 수영 훈련차 학생단체 등이 쇄도한다. 이 학생 훈련생들은 연중 정례로 오는데 2,3년 계속하여 온 학교 중에는 대구 의전생(醫專生)과 대구 중학생은 수영 감독 겸 지도하는 선생이 인솔하였다. 1928년(소화3년)경에 십수 명의 대구 중학생 중 두 명이 수영을 하다 경련을 일으키는 것을 목격한 인솔 선생이 무아무중(無我無中)으로 뛰어들어 난을 면케 한 것은 다행한 일이었으나 구제해 준 선생은 심장마비.. 2015. 5. 4.
김형윤의 <마산야화> - 10, 양악대 11, 감전사 제1호 10. 양악대(洋樂隊) 마산부내에 양악대가 시초된 것은 1911년 전후라고 기억되는데 현재 신마산에 자리잡고 있는 마산극장 위편 모 상점 자리에 일본인이 경영한 안부(安部)양복점이 있었다. 여기에 악기를 일본에서 구입하여 활동사진이나 일본 연극단체의 선전으로 신·구마산을 일주하면서 점원들의 후생사업을 하여 왔던 것이다. 그 뒤 몇 년이 지나서 마산 사립 창신학교에도 7인조 양악기를 구입하여 고등과 학생에 한해 연습케 하였는데 총지휘자는 안부(安部)양복점 주인과 직공 몇 사람이었고, 교습을 받은 생도들은 박군현(팔룡), 김인숙, 황장오, 김필석, 김영근, 박성우, 최사규, 김정기, 김상기, 강을렬, 박진우 등 제씨로 기억된다. 이들 창신학교 학생 밴드대는 교내 춘추 대운동회 때는 취악(吹樂)을 하여 선수 .. 2015. 4. 27.
김형윤의 <마산야화> - 8. 말띠 여성의 수난 9. 극장 순례 8. 말띠 여성의 미신 본시 우리 민족 간에는 없던 미신 하나가 이 땅의 여성계에 정착했으니 말띠 여성의 숙명론이다. 이것이 일본에서 건너온 미신인데, 그 근원을 캐어보면 황당무계하기 짝이 없다. 일본 여성들이 크게 기(忌)하는 이 ‘말띠’는 ‘병오생(丙午生)’에 한한 것이지 다른 말띠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이야기인데, 이 병오생의 처녀가 시집을 가면 신랑을 잡아먹든지 아니면 결혼 얼마되지 않아서 상부(喪夫)하기 마련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숙명론이 퍼지게 된 근원을 캐어보면 이러하다. 일본 강호(江戶, 지금의 동경)의 한 반찬 가게 집에 오시찌(於七)라는 딸이 있었는데 이 딸이 방화범이 되어 강호(江戶)의 군데 군데에 불을 질러 주민들의 공포의 대상이 된 일이 있었다. 이 오시찌가 병오생이었는 데서 미신의.. 2015. 4. 20.
김형윤의 <마산야화> - 6. 인단과 유성기 7. 창가 6. 인단(仁丹)과 유성기 일본 대판에 제조공장과 본점을 둔 국내 향료로서 발매된 ‘仁丹’은 경영을 ‘森下 博’이 처음에 근소한 자금으로 시작한 것이 의외에도 동남아와 조선은 물론 얼마 안가서 만몽(滿蒙) 전역에까지 판매망을 석권하였다. 초기에는 글자 그대로 녹두만한 크기에 붉은 색이며 백립(百粒)에 10전이었다. 이것을 집시풍의 일본인들이 이 나라에 돌아다니며 가두 선전은 않고 밤을 이용하여 각 가정을 방문코 유성기(축음기)를 틀어 손님을 모은다. 음반은 조선인으로 제일 먼저 취임했다는 박춘재 재담에 몇 종의 조선노래를 틀어서 이런 신기한 것을 처음 듣는 중년 남녀의 마음을 흥겹게 한 뒤에 본격적으로 거짓말 투성이의 효능을 시부렁거린다. 두통, 치통, 위장병, 신경통, 피로 회복, 악역(惡疫) 예방 등.. 2015. 4. 13.
김형윤의 <마산야화> - 4. 선교사의 박애심 5. 사기 비행사 4. 선교사의 박애심 앞(지난 주)에서 말한 도변(渡邊)이란 포주의 창녀 최모 양이 포주와 항쟁하여 자신이 해방되기 12년 전의 얘기다. 역시 같은 동네에 명월루(明月樓)라는 유곽이 있었는데, 이 포주는 명치 41년 경에 구마산 서성동(町名 시행 전) 해변에 목조 2층을 짓고 일본에서 창기(娼妓)를 모집해 온 젊은 청년으로서 이름을 길천(吉川)이라 하였다. 이 길천이는 불시에 화재를 당하여 유곽을 날려버리고 다시 남성동에다가 덩그렇게 2층 화식(和式) 건물을 지어 창녀업을 운영해왔으나 이번에는 부채로 실패, 제 버릇 개 못 준다는 격으로 이번에는 다시 수성동에 규모를 축소, 목조 단충으로 소자본에 알맞게 가난한 농촌 여식들을 싸게 사서 운영을 해보니 과연 지출은 적고 수입은 느는 편이었으며 이곳을 찾아오.. 2015. 4. 6.
김형윤의 <마산야화> - 2. 변태성 고리업자, 3. 포주의 횡포 2. 변태성 고리업자 시내 서성동(幸町) 일인 간수(看守)부락에 천기(川崎) 모(某)라는 60대 고리대금 업자가 있었다. 집에는 6개월 혹은 길면 1년마다 젊은 여자가 교체된다. 직업은 조선인을 상대하는 고리대금업이다. 일본 은어(隱語)로 고리업이나 창기업(娼妓業) 혹은 호색자(好色者)를 시계의 4시 40분 혹은 8시 20분이라 하여 위의 눈꺼풀이 좌우로 처진 때문에 그들을 꼬집어서 하는 말이라고 한다. 천기(川崎)의 눈도 그러하였다. 피부 빛깔은 검붉어서 고리업자로서 일목(一目) 직감된다. 고리업자나 전당업자는 일본인, 조선인 할 것 없이 음음(陰陰)함은 상통하여 채무자가 기일을 어길 때는 인정사정 헤아리지 않고 즉각 법적 행동을 취한다. 그런데 천기(川崎)의 경우는 다르다. 채무자가 이자나 원금을 환.. 2015. 3. 30.
김형윤의 <마산야화> - 1. 수전노 2제 예고해 드린 대로 오늘부터는 우리 지역 이야기, 목발(目拔) 김형윤 선생의 『馬山野話』를 포스팅하겠습니다. 대부분 일제강점기 마산에서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도시문제뿐만 아니라 당시 마산사람들의 이야기가 다양하게 수록되어있어서 이 도시의 한 시대를 이해하기에는 이만한 자료가 없습니다. 초판본은 목발 선생이 돌아가신(1973. 8. 7 작고) 후인 1973년 말에 출판되었고, 재판은 1996년 ‘도서출판 경남’의 수고로 나왔습니다. 세로쓰기를 가로쓰기로 바꾸었을 뿐 원문을 손대지 않아 초판과 재판의 내용은 다르지 않습니다. 이번 글『馬山野話』는 재판본을 그대로 싣는 겁니다. 원문 그대로이며 혹 탈오자가 있으면 바로 잡겠습니다. 글이 모두 141꼭지라 짧으면 1년6개월, 길면 2년 정도 걸릴 분량입니다. 의 .. 2015. 3. 23.
마산 창원 역사 읽기 (43-마지막 회) - 매립의 도시, 마산 5. 삶과 문화로 보는 마산·창원의 역사 5-8 매립의 도시, 마산 19세기 말, 동성리(현 동성동)에 김경덕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개항된 해인 1899년 10월, 마산포 조창에 들어있던 창원감리서에 ‘서성리에서 오산리(현 오동동)에 걸친 간석지 50파(把, 1파는 양팔을 벌린 길이)를 매립하여 선창의 혼잡을 덜고 지역을 발전시키겠다’는 내용의 청원서를 제출하여 정부로부터 매립허가를 받은 사람이다. 당시의 상황으로 항만건설과 매립사업을 생각한 것은 놀라운 일이다. 일본상인 히로시 세이죠(弘淸三)에게 15,000량의 공사비를 차용하여 매립공사에 착공했으나 안타깝게도 사망하여 그의 꿈은 사라지고 말았다. 1906년 히로시는 김경덕의 매립인허장을 저당 잡을 때 작성한 전집표에 ‘차용금을 갚지 못하면 매립권은 .. 2015. 3. 16.
마산 창원 역사 읽기 (42) - 겨울 언덕에 서서, 『마산문화』 5. 삶과 문화로 보는 마산·창원의 역사 5-7 겨울 언덕에 서서, 『마산 문화』 1979년의 부마항쟁은 10·26을 이끌어 내었고 곧바로 이른바 ‘서울의 봄’으로 이어지면서 민주정부 수립에 대한 기대를 한껏 고양시켰다. 하지만 1980년의 5·18광주학살의 피를 머금고 치솟은 전두환 5공정권의 반동적인 일방통행을 손놓고 지켜 볼 수밖에 없는 무기력함에 모두는 전율하고 절망해야만 했다. 한참 동안의 강요된 침묵과 개인차원으로 분리된 침잠의 시간이 흘러 갔다. 그러다 1982년 언저리로 접어 들면서 새로운 움직임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경남양서보급회 집현전에 관여했던 사람들이 소모임 형태로 모이면서 경제와 한국근대사에 대한 세미나가 진행되었고, 경남대와 창원대, 창원전문대 등에서는 탈춤과 마당극을 통해 시련.. 2015. 3. 9.
마산 창원 역사 읽기 (41) - 문화운동공간, 「집현전」과「책사랑」 5. 삶과 문화로 보는 마산·창원의 역사 5-6 문화운동공간, '집현전'과 '책사랑' 근대 대중도서관 사상은 지적 자유에 바탕한 비판의 자유를 확립하려는 데서 비롯됐다.이 사상은 1600년대 프랑스의 노데가 기초를 닦고, 1789년 프랑스 대혁명에 의하여 완성되었다. 여기서 비롯된 근대 도서관 운동은, 첫째, 도서관은 모두에게 개방되어야 하고, 일반대중의 접근이 편리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근대 이전의 도서관은 일반인들에게 비공개로 운영되었고, 위치도 일반인이 접근하기 쉬운 곳보다는 지배계층이 거주하는 비공개적인 곳에 있는 것이 보통이었다. 둘째, 책에 대한 접근이 자유로워야 한다는 것이다. 아무리 많은 책을 소장했다고 해도 일반인이 자유롭게 장서에 접근하지 못한다면, 그 장서는 사회적으로 유용하다고 볼 .. 2015. 3. 2.
마산 창원 역사 읽기 (40) - 공기 좋은 마산의 표본, 결핵병원 5. 삶과 문화로 보는 마산·창원의 역사 5-5 공기 좋은 마산의 표본, 결핵병원 흔히들 마산을 두고 공기 좋고 물 맑아 인심이 후한 곳으로 일컬어져 왔다. 맞는 말이다. 온난한 해양성 기후를 접하고 살아가는 마산시민들은 잘모르지만 타지사람들이 마산에 오면 안온한 기후에다 살기 좋고 쾌적한 도시임을 실감한다고 솔직히 털어놓는다. 일찍이 일제가 마산을 강제 개항시키고 나서 온난한 날씨에다 더 없이 맑은 물과 공기에 착안하여 거점도시의 기틀로 삼은 점을 눈여겨 봐야 할 것이다. 먼저 기후부터 보자. 마산은 중위도 유라시아 대륙의 동안에서 길게 뻗은 한반도 남동쪽에 위치해 있다. 기후의 특색을 보면 먼저 온대 몬순기후로 겨울철에 한랭 건조한 대륙성 극기단에서 발생하는 북서계절풍과 여름철엔 고온다습한 열대기단에.. 2015. 2. 23.
마산 창원 역사 읽기 (39) - 일본 청주에 밀려난 조선 탁주 5. 삶과 문화로 보는 마산·창원의 역사 5-4 일본 청주에 밀려난 조선 탁주 역사 연구에도 일종의 흐름이 있다. 술과 같은 음식문화도 그런 흐름을 타는 품목 중의 하나이다. 사실 유교주의적 학문 세계 속에서 먹는 것이라든가 입는 것, 또는 인간의 본능과 관련된 분야는 늘 소외되어 왔다. 송나라 때의 주자학자들이 강조한 바와 같이, 인간에게 있어서 굶어죽는 일은 아주 사소한 것인 반면, 의리를 잃는 것은 매우 중대한 문제였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상이 바뀌었다. 역사에서는 국가나 민족, 이념, 엘리트 등도 중요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인간을 둘러싸고 있는 일상 생활 그 자체 역시 중요하다고 인식하게 되었다. 식욕이나 성욕과 같은 인간의 본능이 최근에 이르러 인문학자들에게 중시되고 있는 이유이기도.. 2015. 2. 16.
마산 창원 역사 읽기 (38) - 귀환동포와 하모니카촌 5. 삶과 문화로 보는 마산·창원의 역사5-3  귀환동포와 하모니카촌  1945년 8월 15일, 일본 왕의 항복 소식을 들은 한국 임시정부의 김구 주석은 깊이 탄식하며 눈물을 흘렸다 한다. 광복군을 길러 연합군의 당한한 부대로 참전하려던 계획을 실현시키지 못한 상태에서 전쟁이 끝나버린데 대한 통한의 눈물이었다. 조국 해방의 주체가 한국민이 아니고 외세였을 때, 그 외세의 간섭이 조국의 운명에 어떤 부정적 영향을 끼칠지 염려했기 때문이다.일본의 항복 소식에 국내외의 동포들은 감격에 벅차 있었지만 상황이 바람직한 방향으로 전개되지는 못했다. 여운형 중심의 중도계열 인사들이 건국준비위원회(건준)를 결성하여 치안을 맡고, 일본인들의 재산을 관리하며, 심지어 해외동포들의 국내 귀환을 위한 배까지 보내는 등의 활동.. 2015. 2. 9.
마산 창원 역사 읽기 (37) - 마산의 심장, 어시장 5. 삶과 문화로 보는 마산·창원의 역사 5-2 마산의 심장, 어시장 어시장은 마산의 심장이다. 어시장의 성쇠와 마산은 하나다. 어시장이 살아 숨쉴 때 마산은 피가 끓는 청년이 된다. 어시장의 하루는 아직도 밤이 깊은 새벽 3∼4시부터다. 너른마당의 새벽시장에는 시골에서 지은 채소를 한 보따리 머리에 이고 내리는 할머니, 전날 오후 잡은 게 한 동이를이고 나와 앉은 아주머니, 집에서 만든 고추장, 된장, 된장에 박은 고추를 수북히 담아 들고 나온 할머니가 나란히 앉아 손님을 기다리고 건어물가게 주인들은 멸치, 꼴뚜기 등을 수북히 담아 가게 앞에 진열하기 바쁘다. 대풍골목 앞 공터에는 횟집주인들이 5∼6시경이 되면 수십 대의 물차에서 펄떡펄떡 살아있는 히라스(부시리), 광어, 농어, 숭어 등 제철 횟감을 .. 2015. 2. 2.
마산 창원 역사 읽기 (36) - 중성리에서 쿄마찌(京町)까지 5. 삶과 문화로 보는 마산·창원의 역사 5-1 중성리에서 쿄마찌(京町)까지 조선 중기, 대동법이 시행되자 해로가 연결되는 전국 각지에 조창(漕倉)이 설치 되었다. 경남에는 영조 36년(1760년)에 창원 마산창과 진주 가산창(駕山倉)이, 1765년에는 밀양 삼랑창(三浪倉)이 설치되었는데 마산창 관할구역은 인근 8개 읍이었다. 고려시대에도 마산포구에 석두창이란 조창이 설치된 적이 있었으나 이미 없어지고 이때 다시 신설되었다. 현 제일은행 마산지점과 남성동파출소 주변 1,700여 평의 부지에 총 8동, 53칸(間) 규모에 ㄷ자 형태로 바다 쪽을 향하고 있었다. 조창이 설치되자 먼저 관원과 상인들이 찾아들었고, 이들을 상대로 생업을 하기 위해 인근 주민들이 모여들면서 점차 동리를 이루었다. 동성, 중성, 오.. 2015. 1. 26.
마산 창원 역사 읽기 (35) - 제일여고 터에 일본 신사가 있었다 4. 유적으로 보는 마산·창원의 역사 4-9 제일여고 터에 일본 신사가 있었다 일제가 우리 민족을 무력으로 위압한 것이 군대와 경찰이었다면 정신적으로 위압한 것은 신사(神社)였다. 마산 제일여고 터가 신사였다. 지금은 제일여고 뒤에 큰 도로가 나있지만 신사의 뒤쪽은 산이었다. 바다에서 보면 산을 향해 일직선으로 급하게 상승하는 길의 끝이다. 길 양옆에는 벚꽃나무가 즐비했고 길바닥은 조약돌이 깔려 있었으며 신사의 신주문에 이르기까지 층층이 돌계단을 밟고 올라가야 했다. 조선인이 거주했던 구마산 지역 산제당 가는 길의 꾸불꾸불하고 아기자기한 산길과는 몹시 대조적인 길이었다. 신주문 앞의 왼켠 마당에는 큰 대포 하나가 있었는데, 그 대포도 신사와 함께 동향으로 서서 마산 시가지를 내려다 보았다. 마산시의 지붕.. 2015. 1. 19.
마산 창원 역사 읽기 (34) - 조선시대의 정보통신, 자여역과 봉수대 4. 유적으로 보는 마산·창원의 역사 4-9 조선시대의 정보통신, 자여역과 봉수대 우리는 산업사회에서 정보사회로의 급속한 변천을 좋아하든 싫어하든, 그것이 행복한 삶을 위해 참으로 필요한 것인지 따져볼 겨를조차 없이‘정보의 홍수’에 빠져 살고 있다. 많은 돈을 들여서 각종 정보기기의 사용법을 익혀야 직장에서 살아남을 수 있게 되었고, 컴퓨터 하나쯤은 집안에 사들일 수 있어야 직장 생활도, 자녀들의 학교 공부도 가능한 세상이 된 것이다. 수요에 따라 공급이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공급이 수요를 만들어 내기도 하는 자본주의의 법칙은 사람들이 저마다 주머니에 하나씩 넣고 다니는 휴대전화만 보더라도 금방 알 수 있다. 새 휴대전화를 구입하는 사람들은 참으로 필요해서 선택하고 사들이는 것이 아니라, 첨단기.. 2015. 1. 12.
마산창원 역사 읽기 (33) - 지방교육의 중심, 향교와 서원 4. 유적으로 보는 마산·창원의 역사 4-8 지방교육의 중심, 향교와 서원 전근대사회의 교육은 모든 이들에게 기회가 주어진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평등사회가 아님을 보여주는 예이다. 조선시대만 하더라도 법적으로는 양인 농민 이상이 과거를 통해 관직에 진출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건 그림의 떡이었다. 온종일 책을 끼고 살았던 양반들과 생업에 전력할 수밖에 없는 농민들이 형설지공(螢雪之功), 주경야독(晝耕夜讀)으로 그들과 경쟁하여 과거에 합격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양반의 자제들은 서원에서 향교에서 교육을 받았다. 과거시험을 치르고 그들은 관료로 나아갔고 이로 인하여 경제적 기반도 확보할 수 있었다. -지방교육의 중심-향교에서- 교동, 교촌, 교촌동, 교리, 명륜동……. 이러한 마을 이름의 공통점은 무.. 2015. 1. 5.
마산 창원 역사 읽기 (32) - 4군6 진의 개척자, 최윤덕 장군의 묘가 창원에 있다 4. 유적으로 보는 마산·창원의 역사 4-7 4군 6진의 개척자, 최윤덕 장군의 묘가 창원에 있다 세종 때에는 최윤덕, 이천, 김종서 등의 활약으로 4군과 6진이 설치되고 압록강과 두만강의 국경이 확정되었다. 고등학교 교과서에 실린 최윤덕 장군에 관한 내용의 전부이다. 장군에 관한 내용이 너무나도 짧아서일까, 대개 수업시간에도 교과서만큼이나 짧게 언급을 하고 다음 단원으로 넘어가기 일쑤다. 우리 학교 1학년 학생 200명을 대상으로 최윤덕 장군에 대한 인지도와 인물사 학습에 대한 경험을 조사해 본 적이 있다. 그 결과는 역시 현 역사교육의 수준과 문제점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었다. 장군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는 학생과 창원에 장군의 묘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학생은 각각 9%에 불과했다. 중학교에서 역.. 2014. 12. 29.
마산창원 역사 읽기 (31) - 9산 선문의 남쪽 끝, 봉림사 4. 유적으로 보는 마산·창원의 역사 4-6 9산 선문의 남쪽 끝, 봉림사 봉림산 중턱까지 올라가노라면, 산들바람을 벗삼아 옛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듯한 봉림사 옛터에 이르게 된다. 그 흔적만 쓸쓸하게 남아있는 건물지, 탑지, 연못지 등은 우리의 기억을 천년 전의 아득한 세월 속으로 이끌어 당긴다. 나말여초! 이 땅에는 사회변동의 기운과 전쟁의 폭풍우가 휘몰아치면서 사람들은 자신의 삶과 믿음을 기댈 수 있는 안식처를 찾아 헤매고 있었다. 무너져가던 신라왕실이나 왕실·중앙귀족과 밀착된 화엄종 등의 교종은 이제 더 이상 그들이 기댈 곳이 아니었다. 여러 곳에서 자라나던 지역의 세력가들이나, 미륵신앙·선종 등이 희망으로 떠올랐다. 천년 전 우리 지역인 김해와 진례에서도 경주의 중앙정부와 독립된 세력가들이 나타.. 2014. 12. 22.
마산창원 역사 읽기 (30) - 네온사인에 가려진 월영대 4. 유적으로 보는 마산·창원의 역사 4-5 네온사인에 가려진 월영대 신라는 삼국을 통일한 이후 김춘추 즉 태종 무열왕계의 왕권을 중심으로 전제 왕권을 수립하였다. 이런 과정에서 정치이념의 도구로 유학이 도입되고 6두품 계열의 지식인들은 국왕의 조력자로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강수, 설총 등이 그들이었다. 그러나 혜공왕 말기부터 시작된 정치적 분규는 진골 귀족들 간의 왕위쟁탈전으로 신라 하대(下代)의 혼란을 가져왔고, 골품제도로 인한 6두품들의 정치 참여 또한 한계를 가지고 있어 이들은 정치권력의 핵심에서 밀려나고 있었다. 중앙의 진골 귀족들이 권력의 요직을 독점하였고, 지방의 유력자들이나 6두품의 정치적 진출은 차단되었다. 신라 사회에 불만을 품은 6두품 계열의 지식인들은 당나라로 유학을 떠났다. 심.. 2014. 12. 15.
마산창원 역사 읽기 (29) - 노힐부득과 달달박박 4. 유적으로 보는 마산·창원의 역사 4-4 노힐부득과 달달박박 푸른 및 드리운 바위 앞에 문 두드리는 소리, / 날 저문데 그 누가 구름 속 길을 찾느뇨.남암(南庵)이 가까우니 그곳으로 가시지, / 내 앞의 푸른 이끼 밟아 더럽히지 마오. 산골에 해 저무니 어디로 가리, / 남창(南窓) 빈자리에 머물고 가오. / 깊은 밤 백팔염주 세고 있으니, / 길손이 시끄러워 잠 못 들까 두려워라. 『삼국유사』권 4 탑상(塔像)편에는 백월산의 두 성인 노힐부득과 달달박박의 수도와 성불 과정을 상세히 전하고 있다. 위의 찬문(贊文) 가운데 앞의 것은 백월산 북암(北庵)에서 수도했던 달달박박을, 뒤의 것은 남암(南庵)의 노힐부득을 찬한 것이다. 어두운 밤 백월산 깊은 골짜기를 찾아온 낭자-여인으로 현신한 관음보살-를 .. 2014. 12. 8.
마산창원 역사 읽기 (28) - 가야시대를 살다간 사람들의 흔적 4. 유적으로 보는 마산·창원의 역사 4-3 가야시대를 살다간 사람들의 흔적 우리는 신문, 방송 등의 언론 매체를 통하여 우리 조상들이 남긴 문화재에 대한 기사를 접하곤 한다. 예를 든다면 함안 마갑총에서 국내 처음으로 국보급의 가치를 가진 철제 말갑옷이 출토되어 수수께끼로 남아있던 고대 가야사를 재조명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든가, 또는 창원 다호리무덤에서 통나무 형태의 목관 실물과 더불어 각종 토기, 칠기, 철기류 그리고 필기용 붓이 발견되어 2,000년전에 이미 문자를 이용한 기록이 가능했고, 가야 초기 역사를 살펴볼 수 있는 획기적인 자료가 출토되었다 등등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마산·창원 지역은 지형상으로 마을 배후에 솟아있는 높은 산은 바람을 막아 주어 추위를 피할 수 있으며 주변에 하천을 끼.. 2014. 12. 1.
마산 창원 역사읽기 (27) - 옛사람들의 쓰레기장, 성산패총 4. 유적으로 보는 마산·창원의 역사 4-1 옛사람들의 쓰래기장, 성산패총 직선길이 12.5km로 전국 시가지 도로 중 가장 긴 창원대로를 따라 자동차로 20여분 달리다 보면 광활한 창원공단 한 복판에 야트막한 야산이 시야에 들어온다. 거기에 성산패총이 있다. 성산패총은 공단도시 창원시민들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다. 창원공단은 기계생산이 주류이다. 지금의 창원모습이 될 것이라고 예견하듯 성산패총에는 조개껍질과 토기류 외에 철을 생산했던 흔적이 발견돼 야철지(冶鐵地)로도 명성이 높다. 오늘날 창원공단을 이룬 요람인 셈이다. 지금 성산패총은 사적 240호로 지정되어 보존되고 있다. 지금도 유적지가 발굴되어 보존되는 경우는 드물다. 개발이 항상 우선이었기 때문이다. 성산패총이 발굴된 1970년대 초는‘산업근대화.. 2014. 11. 24.
마산·창원 역사 읽기(26) - 고인돌은 지배층의 무덤이었나? 4. 유적으로 보는 마산·창원의 역사 4-1 고인돌은 지배층의 무덤이었나? 인류가 지구상에 처음 출현한 구석기시대부터 사람들은 ‘죽음’이라는 피할 수 없는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다. 과거의 사람들이 죽음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졌는지를 구체적으로 알 수는 없지만, 무덤을 통해서 그 생각의 일부를 엿볼 수 있다. 무덤을 만들어 시신(屍身)을 따로 모시는 것 자체가 ‘죽음’은 삶의 연장이었으며, 내세관(來世觀)의 표현이었던 것이다. 시신을 별도의 장소에 모시는 것은 물론 껴묻거리副葬品를 함께 묻은 것으로 보아 내세를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전 세계적으로 볼 때 구석기시대 후기에 이르러서 무덤이 만들어졌던 예가 가끔 있기는 하다. 한반도의 경우 구석기시대의 무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신석기시.. 2014. 11. 17.
마산창원 역사 읽기 (25) - 문화권력, 이은상 3. 지역의 인물을 찾아서 3-8 문화권력, 이은상 어제 온 고깃배가 고향으로 간다하기 / 소식을 전차하고 갯가으로 나갔더니 / 그 배는 멀리 떠나고 물만 출렁거리오. (, 1923년) 봄처녀 오시누나 새 풀옷을 입으셨네 / 하얀구름 너울쓰고 구슬신을 신으셨네 / 꽃다발 가슴에 안고 누굴 찾아 오시는고. (, 1925년) 내 고향 남쪽바다 / 그 파란물 눈에 보이네 / 꿈엔들 잊으리요 / 그 잔잔한 고향바다 / 지금도 / 그 물새들 날으리 / 가고파라 가고파. (, 1932년) 앞의 두 노래는 중고등학교 음악교과서에 실려 우리에게 친숙한 곡이고, 마지막 노래는 우리 국민들 모두가 애창하는 노래다. 이 노래 가사를 지은 사람이 이은상이다. 가 국민들이 애창하고 또 마산을 상징하는 노래로 널리 불려지면서 이.. 2014. 11. 10.
마산창원 역사 읽기 (24) - 「아이들에게 희망을」- 이원수 3. 지역의 인물을 찾아서 3-7 「아이들에게 희망을」, 이원수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이 땅에 사는 사람이면 이라는 노래를 불러 보지 않았던 사람이 있을까? 노랫말을 쓴 사람이 동원 이원수다. 그는 15세 되던 해 방정환이 내던 잡지『어린이』에 이 당선된 후 71세의 나이로 이 세상을 떠나기까지 주옥같은 작품을 수도 없이 남겼다. 동요, 동시, 동화, 소년소설, 아동극, 수필, 시, 아동문학 평론 등 모두 800여 편의 방대한 작품을 남겨 아동문학의 거의 모든 분야에서 그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었다. 그의 문학은 늘 인간의 삶을 중심으로 하였고, 우주 만물의 모든 사물을 소재로 삼으면서 서로 사랑하며 함께 살아가야 할 것을 강조하였다. 그는 이념의 갈등으로 희생되고 서로를 죽였던 처.. 2014. 11. 3.
마산창원 역사 읽기 (23) - 민간인 학살의 피해자와 가해자들 3. 지역의 인물을 찾아서 3-6 민간인 학살의 피해자와 가해자들 ‘학살’이라고 하면 우리는 흔히 캄보디아의 킬링필드나 나치의 유태인학살을 떠올린다. 그러나 우리나라, 특히 마산과 창원에서도 이를 능가하는 민간인 학살이 있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특히 지난 1999년 9월 가 이 사실을 보도하기 전까지만 해도 마산·창원지역의 민간인 학살사건은 철저히 비밀에 부쳐져 왔다. 『마산시사』나『창원군지』, 『경남도사』는 물론 지역의 역사를 기록한 어떤 책에도 이에 대한 이야기는 없었다. 왜그럴까? 그것은 바로 이 사건이 ‘국가범죄’이기 때문이다. 법을 만들고 집행하는 국가기관이 합법적인 재판절차도 거치지 않고 불법으로 민간인을 죽였기 때문이다. 심지어 국가는 이 문제를 입 밖으로 꺼내는 사람까.. 2014. 10. 27.
마산창원 역사 읽기 (22) - 백범도 존경했던 독립운동가「이교재」 3. 지역의 인물을 찾아서 3-5 백범도 존경했던 독립운동가 「이교재」 1982년 3월 1일, 언론은 이교재 선생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경상남북도 상주대표였음을 증명하는 위임장이 발견되었다고 보도하였다. 그 동안 남몰래 보관해오던 선생의 양자인 이정순씨가 공개한 위임장은 가로 29cm 세로 20cm 크기의 명주천에 붓글씨로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다. 이교재를 경상남북도 상주대표로 다음 사항을 위임한다. 하나, 애국지사 연락에 관한 일, 하나, 독립운동에 대한 비밀적 지방조직을 행할 일, 하나, 독립자금을 모금하는 일. (李敎載 右人을 慶尙南北 常駐代表로 右記事項을 委任함 一. 有志者 聯絡에 關한 일, 一. 獨立運動에 對한 秘密的 地方組織을 行할 일, 一. 政府에 對한 特殊獻誠을 勸行케 할 일, 大韓民國 .. 2014. 10.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