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도시이야기633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204) - 강점제3시기 3) 다섯 문헌에 나타나는 동(洞)별 개체 건물용도 여기서 말하는 다섯 문헌은 馬山市史, 馬山商工會議所百年史, 馬山と鎭海灣, 馬山案內, 경상남도통계연보 등을 말합니다 이 다섯 문헌을 분석대상으로 선택한 기준은 타 문헌에 비해 필요한 자료가 상대적으로 많이 수록되어 있었기 때문이며 여타의 다른 기준은 없었습니다. 각 시기의 필지별 건물 용도에 관한 자료가 없기 때문에 부득이 마산관련 각종 문헌에 단편적으로 혹은 집단적으로 기재되어 있는 건물의 위치를 확인할 수밖에 없습니다. 소개하는 문헌의 성격이 각각 다르기 때문에 건물의 양에서 우선 차이가 클 뿐만 아니라 시기별 용도에 대한 구분이 되지 않아 중복이 되거나 부정확 혹은 누락도 많을 것이기 때문에 합리적인 자료라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단지 이 통계가 당.. 2014. 3. 10.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203) - 강점제3시기 지난 주 포스팅한 ‘각종 문헌에 나타난 토지 이용’에 이어 오늘은 ‘사진 및 관련 자료를 통한 추정’을 해보겠습니다. 2) 사진 및 관련 자료를 통한 추정 각 시기의 도로구조와 중요건축물의 위치는 지금까지 제시한 지도 38점과 각 시기의 시설물 설명을 통해 알 수 있지만 이 외에 당시의 도시현황을 시각적으로 알 수 있는 자료를 찾기는 쉽지 않습니다. 여기서는 지금까지 소개한 그림자료 중 토지이용상태를 가늠할 수 있는 6점의 사진과 지도 2매를 통하여 당시의 현황을 추정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1. 사진 「1910년 경 원마산 건염어점(乾鹽魚店)」전경 1 2. 사진 「1910년 경 원마산 건염어점(乾鹽魚店)」전경 2 두 사진은 합방 직전 촬영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좁은 길을 따라 초가지붕의 상점들이 조밀하게.. 2014. 3. 3.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202) - 강점제3시기 토지 이용이란 도시 내 각 지역의 성격을 말하는 것으로서 사실상의 용도지역 구분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미 지나간 시기의 토지이용상태를 구분할 수 있는 방법은 시가지 범역을 파악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당시의 토지이용과 건물에 관한 자료가 없으면 입증이 곤란하기 때문에 지금으로서는 그러한 자료를 찾아 도시 전체의 토지이용상황을 분석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따라서 비록 정확도가 떨어지더라도 각종 자료에 나타나는 기록의 일편들을 총 망라하는 등 현 상황에서 시도해볼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할 수밖에 없는데 여기서는 가. 문헌과 사진에 나타난 토지이용 나. 공간구조․소유상태를 통한 추정 다. 토지가격에 의한 추정 의 세 가지로 나누어서 접근해보도록 하는데 이 글에서는 ① 문헌과 사진에 나타난 토지이용 중 .. 2014. 2. 24.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201) - 강점제3시기 원마산의 도로는 1910년까지 자연발생적 세도 밖에 없었으나 1910년대 들어서 근대식 도로가 격자형으로 조성되기 시작하였고, 이와 함께 해안에 매립도 시행되어 짧은 기간 동안 급격한 도시구조변화가 진행되었습니다. 도로망의 패턴은 매립을 하면서 조성된 도로와 자연취락 내에 신설된 도로의 축(軸)이 아래 그림에서 보는 것처럼 서로 상이하였습니다. 도로망의 패턴이 일정한 체계를 갖추어 발달한 것이 아니라 기존의 도로를 확장하는 수준에 머물렀던 것입니다. 또한 초기의 도로망에 비해 후기에 갈수록 도로망 개설 영역이 빠른 속도로 확산되었으며 강점 말기에는 기존 원마산 시가지 전체가 격자형 도로망 구역 내의 영역으로 변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특히 해안의 매립지는 직사각형 격자형 도로망이 뚜렷이 그 형태를.. 2014. 2. 17.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200) - 강점제3시기 지난 글에 이어 도로망패턴에 대한 내용입니다. 2) 강점 제1시기(1911년-1920년) 강점 제1시기인 1910년대 초기에는 신마산과 원마산을 연결하는 중심가로가 약 15m 폭으로 준공되었으며 이 무렵 진주가도의 확장공사도 완료되어 두 도로가 연결되었습니다. 신마산과 원마산을 연결하는 중심가로는 원마산의 시가지 한복판까지 이어졌고 때를 맞춰 원마산에 다수의 근대식 격자형도로가 개설되었고, 이 도로는 남성동 매립지의 격자형 도로와 연결되었습니다. 이로써 최초로 신마산과 원마산을 연결하는 근대식 중심가로와 두 시가지에 격자형의 도로망이 개설되어 도시의 도로망 패턴이 근대적 형태를 띠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일정한 체계를 가지고 계획된 신마산과 달리 원마산의 도로망은 격자 체계가 명쾌하게 조성되지 못했습니다... 2014. 2. 10.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99) - 강점제3시기 도시는 교통망, 즉 도로를 중심으로 배치․형성되며 이들 도로의 얽힘 상태를 일컫는 것이 바로「도로망 패턴」입니다. 도시의 형태 구성은 크게 방형상형(方形狀型)․대상형(帶狀型)․방사환상형(放射環狀型)으로 구분하기도 하는데, 이들 세 가지 도시의 도로망 구성을 보면 방형상형은 격자(格子)와 장방형(長方形), 대상형은 선상(線狀), 방사환상형은 방사동심원형(放射同心圓形)입니다. 다음 그림은 현대도시계획의 선구자로 불려지는 소리아 이 마타 (Soria Y. Mata)가 1882년 제안한 선상도시입니다. 도시의 형태가 특정한 양식으로 결정되는 과정은 그 도시의 역사적 배경과 사회적 성인(成因) 및 입지조건이 작용합니다. 특히 자연조건은 도시형태를 결정하는데 있어서 어느 요소보다도 능동적으로 작용한다고 볼 수 있습.. 2014. 2. 3.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98) - 강점기 정리 강점기 동안 있었던 마산의 도시변화 중 에 대한 내용을 정리해보겠습니다. 개항기 원마산의 시가지 범역 규모는 약 0.19㎢였고 이는 1910년 합방기까지 변화가 없었습니다. 1910년대 들어서 경제적 잉여를 목적으로 시행된 남성동의 매립과 구마산․북마산 두 역의 발달로 인해 유통이 활발해지고 인구가 증가하면서 시가지가 확산되었는데 이미 인근에 자리하고 있던 자연취락까지 연결될 정도의 확산양상을 보여 1930년에는 0.9㎢로 약 470%나 확장되었습니다. 시기적으로는 1920년대 이후부터 확산의 강도와 속도가 강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 원인은 산업의 발달에 따른 도시인구의 증가와 철도역으로 인한 인근지역과의 교류 때문이었습니다. 확산의 방향은 원마산의 자연적 조건(원마산을 지형적으로 보면 남쪽 신마산 방.. 2014. 1. 27.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97) - 강점기 정리 1) 인구변화 추이 개항부터 해방까지의 마산인구 변화를 그래프로 정리한 것이 다음 표입니다. 개항 초기에 1만여 명이었던 마산의 인구는 합방기에 1만 6천여 명이 되었는데 이 중 일본인이 6천여 명이었고 한국인은 1만여 명이었습니다. 그러나 이후 10여 년 동안 마산의 전체 인구는 변화가 없었습니다. 폐항으로 인해 일본인이 2천여 명 정도 줄었으나 한국인은 2천여 명 정도 더 늘어났기 때문이었습니다. 1920년대가 지나면서 마산의 인구는 약 1만여 명이 늘어나 2만 6천여 명이 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일본인의 숫자도 늘어나 다시 5천명을 넘어서게 되었으며 한국인도 2만 명을 돌파하였습니다. 이런 인구 증가 현상은 회사령 폐지로 인한 산업구조의 변화 때문이었으며 결과적으로 시가지의 확산과 토지이용구조의 변화.. 2014. 1. 20.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96) - 강점기 정리 어느 도시건 시가지의 확산은 사회경제적 조건과 인구의 변화 등 여러 가지 요인에 의해 진행됩니다. 확산과정에서 나타나는 양상, 즉 방향성․속도․형태 등은 자연적 조건과 사회적 상황에 따라 위치를 비롯한 강약과 완급의 정도가 다르게 나타납니다. 이런 현상은 원마산(마산포)과 신마산 두 도시로 나누어져 있었던 마산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원마산과 신마산을 나누어 설명해보겠습니다. 1) 원마산(마산포) 현 남성동과 동성동 해안일대에 밀집하여 조성되어 있던 자연취락 형태의 전통도시였던 원마산은 개항이후 일본인에게 토지의 소유권이 넘어가고 상권 침범을 당했습니다. 특히 원마산에서 볼 때 신마산 방향(남쪽)인 수성동 일대는 1910년 경 무려 66%의 토지가 일본인의 소유가 되어버리는 큰 변화를 겪습니다. 비록 도.. 2014. 1. 13.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95) - 강점기 정리 지난 회 까지는 1945년까지 생성·변화해온 마산 도시의 변천과정을 총 194회에 걸쳐 소개했습니다. 오늘부터는 1945년까지 변해온 마산도시의 특성을 정리해 보겠습니다. 일반적으로 도시의 구성요소로 ① 시민(citizen), ② 활동(activity), ③ 토지(land), ④ 시설(facility)의 네 가지를 듭니다만 이를 둘로 묶으면 인간적 요소(①시민, ②활동)과 물리적 요소(③토지, ④시설)로 정리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 글에서는 인간적 요소인「시민」과「활동」분야는 아쉽지만 논외로 하고「시민」의「활동」이 이루어지도록 수용해 주고 뒷받침해 주는 물리적 요소, 즉「토지」와「시설」중 일부를 살펴보되 정확하게 확인되고 분석 가능한 것들, 즉 ① 시가지 확산 : 도시영역을 형성하는 물리적 시설(도.. 2014. 1. 6.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94) - 강점제3시기 120회부터 시작된 1930년대 이후 마산도시변화에 대한 마지막 포스팅입니다. 일제 강점 제3시기는 만주사변에 이어 중일전쟁, 태평양전쟁으로 이어진 전쟁기로서 한반도를 병참기지화한 시기로, 일제는 한국인의 민족의식과 항일의식을 잠재우기 위하여 소위 황국신민화정책을 폈습니다. 1930년의 마산 인구는 27,885명이었는데 1940년에는 36,429명이었습니다. 비율로 보면 30.6% 증가했습니다. 같은 시기에 목포가 85.2%, 부산이 70.9%, 진주가 71.9% 증가한 것과 비교해 볼 때 매우 낮습니다. 하지만 강점 후기에 행정구역이 개편되면서 인구가 크게 증가하게 됩니다. 1920년대부터 시작된 중앙마산 조성계획은 1930년대 들어서 본격적으로 시행되었습니다. 1920년대에는 중앙동 2가와 3가, 즉.. 2013. 12. 30.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93) - 강점제3시기 1930년대부터 해방 때 까지 원마산의 범역이 많이 넓어졌습니다. 해방 무렵에는 북서쪽으로 상남동을 지나 회산교까지 원마산과 이어짐은 물론 오동교까지 건물이 가득 들어섰으며, 해안지역에는 오동교까지 매립공사가 진행되었습니다. 이런 변화와 달리, 산호리는 여전히 원마산과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었습니다. 당시 산호리의 정경은 1941년 발표된 지하련의 단편소설「체향초(滯鄕抄)」에서 잘 묘사하고 있습니다. 시인 임화의 둘째 부인이었던 소설가 지하련(1910년, 거창생, 본명 이현욱 李現郁)은 천석지기 집안에서 태어나 1926년 마산으로 이주하여 1935년 마산으로 내려온 임화와 결혼, 1938년 상경하였습니다. 하지만 1940년 결핵에 감염되어 마산 산호리 562번지로 낙향하였다가 1947년 가을, 임화와 함.. 2013. 12. 23.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92) - 강점제3시기 이번에는 강점 제3시기에 있었던 마산의 도시구조 변화에 대해 정리합니다. 만주사변 등으로 1930년 이후 국내의 사회경제적 상황은 최악이었으며 이로 인해 발생한 급격한 이농현상으로 도시의 물리적 환경도 점점 열악해갔습니다. 그러나 마산의 경우, 위치가 전선과 멀다는 이유도 있었겠지만 일본과 대륙을 연결하는 접점이라는 점과 군수물자 공급창이라는 점 때문에 새로운 매립도 시도되는 등 적지 않은 변화가 있었습니다. 오히려 마산의 건설경기가 과도하게 상승하여 ‘황금시대’ 운운할 정도였습니다. 지형적으로 볼 때 매립 전의 마산은 자산동 입구, 즉 몽고정 부근에 해안이 깊고 환주산이 해안 쪽으로 돌출해 있어서 가용대지가 협소했습니다. 특히 이곳에는 두 개의 철도와 한 개의 간선도로(현재의 장군로)가 지나고 있어서 .. 2013. 12. 16.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91) - 강점제3시기 도시문제와 관련한 두 기사입니다. 16. 1938년 10월 12일자 동아일보 3면 기사입니다. 기사의 제목은 「都市問題會議에 馬山代表出發」이며 「경성부민관에서 개최되는 전국도시문제 회의 출석과 함께 선진도시의 시찰을 겸하야 마산부회의원과 상공회의소원 일행 20명이 출발하였다」는 내용입니다. 75년 전 식민지시대 일입니다만, 이 기사를 현재 시간으로 당겨보면 「서울시민회관에서 개최되는 전국도시문제회의 참석과 함께 선진도시의 시찰을 겸해 마산시의원과 상공회의소회원 일행 20명이 출발하였다」가 됩니다. 그 때나 지금이나 달라진 건 별로 없습니다. 17. 1938년 12월 11일자 동아일보 7면 기사입니다. 기사의 제목은 「大工場을 誘致 공업용수문제의 해결과 함께 工業馬山府에 朗報」입니다. 기사의 내용을 대략 .. 2013. 12. 9.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90) - 강점제3시기 마산도시변화와 관련한 두 기사입니다. 14. 1936년 7월 28일 매일신보 4면 기사입니다. 기사의 제목은 「약진 마산부의 인구 3만5천을 돌파, 6개월간 1천여 인 증(增)」입니다. 내용은 1936년 상반기 6개월간 마산부의 인구가 1천여 명 증가하여 정체되었던 마산이 연말까지 총인구 3만5천 명을 돌파하겠다는 내용으로 양적으로 성장하고 있는 마산부의 희망적인 미래를 예측하는 기사입니다. 기사 아래의 표는 조선총독부가 정식으로 발표한 강점제3시기(1930-1945) 마산의 인구입니다. 1944년과 1945년 인구는 '마산개항백년사' 등 다른 자료에서 뽑았습니다. 신문기사는 공식통계자료와는 좀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만 크게 틀리지는 않습니다. 15. 1938년 11월 6일 동아일보 4면 기사입니.. 2013. 12. 2.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89) - 강점제3시기 마산도시변화와 관련된 두 개의 기사 두소개합니다. 12. 1940년 2월 3일자 동아일보7면 기사입니다. 기사 제목은 「共同墓地 移轉要望」이고, 내용은 「마산부 완월동 산기슭에 설치되어 있는 현재의 공동묘지는 도시의 미관으로나 일반출입인사의 눈에 뜨이는 점으로 보아 늘 불유쾌한 감이 있어 각 방면에서 항상 논의되어 오던 터에 더욱 마산부에서도 대마산건설을 목표로 명년에 도시계획실시의 예정인 차제 도시미관을 파괴하는 차등공동묘지는 당연 타처로 옮겨야할 것을 크게 요망한다. 차 지구는 마산의 고지대로서 도로가 불편하므로 부 도로 행정에 대한 불편의 소리도 자자하다」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완월동 공동묘지는 1916년에 제작된 마산지도(아래 그림 참조)에도 나타납니다. 이런 것으로 보아 이 공동묘지는 일본인들이.. 2013. 11. 25.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88) - 강점제3시기 도시와 관련한 두 가지 기사입니다. 10. 1938년 7월 21일자 매일신보 6면입니다. 기사의 제목은 「馬山午東洞에 夜市」이며 기사는 「마산부 오동동에 있는 번영회 주최의 납양야시(納凉夜市)는 작년부터 개시 하였던 바 금년에도 지난 17일부터 개시되었는데 첫 날부터 나온 사람이 무려 수천 명에 달하여 납량구역 오동동 일대에는 미증유의 잡담과 은성을 이루었고 주로 과일 도시 목공물 포목 십전균일품 등으로 또 값도 싸므로 성적이 양호하다고 한다」입니다. 1937년부터 개장된 오동동 야시장이야기인데 당시 오동동 모습을 짐작하게 해주는 기사입니다. 기사 중 납양야시(納凉夜市)는 '여름철 더위를 피해 시원한 밤에 열리는 시장'으로 이해할 수 있겠고, ‘은성을 이루었고…’는 요즈음 잘 사용하지 않는 언어로 ‘번화.. 2013. 11. 18.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87) - 강점제3시기 도시변화 관련 기사 두 개 소개합니다. 8. 1938년 2월 24일 동아일보 7면 기사입니다. 이 기사는 돝섬을 새 명소로 만들기 위해 마산중포병연대에서 돝섬공원화 계획을 수립하였다는 내용입니다. 돝섬공원화 계획의 의도는 진해요항부와 비봉리에 해안도로를 조성한 후 진해와 돝섬을 연결하여 진해를 찾은 관광객이 돝섬을 거쳐 마산으로 오도록 한다는 겁니다. 또한 진해 부산 간 계획하고 있는 자동차도로가 개통되면, 돝섬이 연결점이 되어 1시간 3-40분내에 부산-진해-돝섬-마산이 이어질 것이므로 돝섬공원화 계획에 마산부민들도 적극 협력할 것이라 보도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기사처럼 돝섬이 개발되고 부산에서 진해와 돝섬을 거쳐 마산으로 연결되는 교통로가 실제로 만들어지지는 않았습니다. 9. 1938년 6월 3일 동.. 2013. 11. 11.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86) - 강점제3시기 도시변화와 관련된 기사 두 개 소개합니다. 6. 1935년 10월 22일자 매일신보 3면 기사입니다. 기사의 제목은 ‘舊馬山驛移築 用地買收完了’ 이며 기사 내용은 ‘경남 제2의 능률을 내고 있는 구마산역은 외관상 누추와 내용상 협애(狹隘) 및 이의 장래발전에 반(伴)하는 요충지대에 이축을 계획하고 그 동안 용지 매수에 열중 중이던 바 가격 평가가 원만히 되지 못하여 매수에 지장이 되어있던 바 근일에 이것이 호전되어 매수가 거의 완료된 모양이라 하며 가급적 금년 내 완성을 보게되도록 할 것이라 하며 완성 후는 구마산에 신위관(新偉觀)을 정(呈)하리라 한다’ 입니다. 지금의 육호광장 자리에 있었던 구마산 역은 이 신문 기사처럼 위치를 약간 옮겨온 자리입니다. 처음에 있었던 역도 비슷한 위치에 있었습니다만 역.. 2013. 11. 4.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85) - 강점제3시기 오늘도 두 기사 소개합니다. 4. 1935년 4월 11일자 동아일보 기사로 마산의 교육현안에 대한 내용입니다. 기사의 제목은 ‘내 地方當面問題(지방당면문제)’로 내용은 두 가지입니다. 첫 번째 기사는 ‘高普設置問題(고보설치문제)’라는 제목으로 마산에 중등교육기관인 고등보통학교가 필요하다는 내용이며, 두 번째 기사는 ‘商校昇格問題(상교승격문제)’라는 제목으로 당시 3년제 을종학교로 1922년 개교한 마산상업학교(옛 마산상고, 현 용마고)를 5년제 10학급 갑종학교로 승격시키자는 겁니다. 첫 번째 주장인 고등보통학교 설립 문제는 이듬해인 1936년 4월 11일 마산공립중학교(현 마산고등학교 / 개교 당시 5년제 10학급)가 개교됨으로 이루어졌고, 두 번째 주장인 마산상업학교 승격문제는 1939년 5년제 10.. 2013. 10. 28.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84) - 강점제3시기 오늘부터는 1930년대 이후 마산 도시변화와 관련한 신문보도를 기사와 함께 소개하겠습니다. 간단한 기사가 대부분이지만 꽤 볼만한 기사도 있습니다. 1. 먼저 1931년 7월 23일자 동아일보 3면에 게재된 돗섬 관련 기사입니다. 제목은 「納涼村施設 마산 저도에」이며 기사는 「마산부에서는 여름 동안의 피서지(避暑地)로 마산부 저도리(猪島里, 돗섬)에 납량촌(納凉村)을 신설할 터이라 한다」로 되어 있습니다. 부민들을 위해 돗섬에 어떤 피서시설을 만든다는 내용인데 건물을 짓는다는 건지 해수욕 시설을 조성하는 건지 이 기사만으로는 구체적인 내용을 모르겠습니다. 2. 1933년 11월 19일자 동아일보 3면에 게재된 몽고정 관련 기사입니다. 제목은 「馬山 蒙古井 大谷博士 證明」이며 기사는 「지난 14일 성대교수 .. 2013. 10. 21.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83) - 강점제3시기 '관광 마산'에 소개된 사진 중 마지막 석장입니다. 53. 자안지장(子安地藏) 자안지장에 대해서는 처음 접하는 분이 많을 것 같아서 우선 관련 글 한편 소개합니다. 『약진 마산의 전모』에 실린 글입니다. "구강(마산 팔용산 수원지 내지 산호리 일대) 광천 쪽으로 가는 왼쪽으로 상당한 급경사의 산길을 약 1시간 가량 올라가면 자안지장을 안치해놓은 곳에 다다르는데, 거암 아래의 안쪽에 안치된 지장불 근처에는 송송 맑고 정결한 물이 샘솟는다. 전설에는 이 거암을 '상사암'이라 부르는데, 남녀가 서로 연모하였으나 결국은 부부가 되지 못했다면 뱀으로 변하여 연인을 마음대로 희롱하기 때문에 이 바위 위에 앉혀서 주문을 외우게 했고, 그렇게 해보아도 효과가 없을 때에는 두 사람 모두를 공물로 바친다고 전한다. 이곳을.. 2013. 10. 14.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82) - 강점제3시기 오늘도 그림 석장입니다. 50. 마산해수욕장 당시 마산 최고의 관광지요 피서지였던 월포해수욕장입니다. 아래 사진은 1934년 7월 5일 자 5면에 실린 이 해수욕장 관련 동아일보 사진 기사입니다. 기사는『때 만난 마산월포해수욕장』이라는 제목으로, 내용은 「여름의 바다는 젊은 남녀들의 마음을 떠들썩거리는 판인데 마산 진해 해수욕장에도 벌써부터 남조선 각지에서 욕객이 모여드는 판이다. 마산 월포해수욕장은 남조선 지방에서도 물이 맑고 모래가 희어 풍광이 명미하기로 이름이 높아 각 여관업자들은 이 때 한목을 보게 된다고 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51. 완월동 부동폭포 장군천 상류에 있는 완월폭포입니다. 이 폭포에 대해 1941년 발간된 『약진마산의 전모』에서는 "화강암의 바위 사이를 이으면서 흐르는 물은 옥을 .. 2013. 10. 7.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81) - 강점제3시기 그림 석장입니다. 47. 마산수도배수지 팔용산 저수지에서 공급된 물을 정수하고 배수하던 곳입니다. 위치는 추산동 마산박물관 일대였습니다. 1930년, 이 정수장이 준공되어 통수식을 할 때, 도지사와 진해요항사령부 사령관까지 참석하여 성대하게 기념식을 하기도 했습니다. 아래 사진은 준공식 당시 마산부윤 판원지이(板垣只二 / 제5대부윤 / 1928.3-1930.10 재임)의 글을 석각해 놓은 「水德無疆(수덕무강)」이라는 넉자 글입니다. 한반도 조선을 영원히 지배할 줄로 알았던 일제관료의 확신과 힘센자의 너그러움까지 서려있는 글입니다. 48. 산제당 당시 마산 사람들의 종교적 근원지였던 환주산에 있었습니다. 사진의 건물은 없어졌지만 지금도 성덕암이라는 자그마한 암자로 남아 있습니다. 언제부터 있었는지는 알 수.. 2013. 9. 30.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80) - 강점제3시기 오늘도 그림 석장입니다. 44. 마산공원 마산신사에 접한 위치. 지금의 제일여고 부지 중 일부였습니다. 조경계획은 임학박사였던 본전정육(本田靜六)이 하였고 수종은 벚나무, 매화나무, 대나무 등이었습니다. 강점기 내내 일본인들의 놀이터와 휴식처로 사용되었습니다. 45. 근위빈공원 일본인들이 주로 사용했던 조그마한 해변공원으로 1934년 월영동 해안에 조성되었습니다. 1941년 벚나무 묘목 1백본, 버드나무 2백본을 이식해 공원을 꾸몄다는 기록도 남아 있습니다. 46. 추산공원 추산동 마산박물관 일대에 있었으며 지금까지 공원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암석이 많았다고 하며, 동쪽에 오래된 벚나무 수십 그루가 있어서 벚꽃이 필 때 쯤이면 관광객들이 많이 찾았다고 합니다. 2013. 9. 23.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79) - 강점제3시기 오늘도 그림 석장 소개합니다 41. 합성리 정동행성지 창원(昌原)이란 지명은 조선시대에 만들어졌습니다. 조선조 3대 태종 8년(1408년)에 의창(義昌)현과 회원(會原)현을 합쳐 창원(昌原)부로 승격되면서 그 이름이 역사에 등장합니다. 의창(義昌)의 ‘昌’자(字)와 회원(會原)의 ‘原’자(字)를 합쳐 만든 이름입니다. 그러나 창원의 부성(府城)은 별도로 없었습니다. 현재 마산 합성동에 유적으로 남아있는 '합포성'의 병마도절제사가 창원부까지 다스렸기 때문입니다. 합성리 정동행성지는 바로 그 합포성을 말합니다.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153호로 등록되어 있습니다만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고 있습니다. 아래 사진은 어느 주택의 담벼락으로 아직 남아 있는 합포성의 성곽입니다. 42. 월영대 월영대는 경상남도기념물 제.. 2013. 9. 16.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178) - 강점제3시기 사진 석장 소개합니다. 38. 농공금융주식회사 1933년 3월 20일 창동 51번지에서 설립, 농공업자에 대한 금융대부와 화재보험 대리점을 함께하였다. 대표는 이봉수 씨. 39. 몽고정 몽고정은 고려 충렬왕 때 중국 원세조가 2차례 일본원정에 나서면서 당시 이곳에 주둔한 군사들에게 마실 물을 공급하기 위해 만든 우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우물 앞에 몽고정이라고 쓰인 비석은 1932년 일본인 고적단체에서 세운 것으로, 그 전에는 고려정이라 불렀다고 합니다. 아래 사진은 지금의 모습입니다. 40 마산성지 정유재란 때 마산에 왜군들이 상륙해 지금의 산호공원인 용마산 일대에 구축한 왜성입니다. 정상부근에 지금도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아래 사진은 현재 모습입니다. 2013. 9. 9.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이야기 (177) - 강점제3시기 이번에도 금융기관 세 곳 사진 소개합니다. 35. 무진회사 1925년 3월 월남동 1가에서 시작한 마산무진주식회사입니다. 1931년 월남동 3가 1번지에 아래 사진처럼 철근콘크리트조 2층 건물을 신축하여 이전하였고 진해에도 지점이 있었습니다. 1936년 경남 도내의 각 무진회사들이 통합하여 부산무진회사를 창립함으로써 부산무진회사 마산지점으로 개편되었습니다. 무진회사는 지금의 상호신용금고를 의미합니다. 36. 마산금융주식회사 1908년 6월 일본인 만무구일(滿武龜一)이 설립한 회사로 각 개인들을 상대로 부동산 담보대출을 목적으로 설립하였습니다. 아래 사진은 1926년 추산동 69번지에 지은 근대적 2층 건물의 사옥니다. 37. 산업금융주식회사 1929년 5월 19일 동성동 173-1번지에서 시작하였고 금전.. 2013. 9. 2.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76) - 강점제3시기 마산에 있었던 세 곳의 금융조합 사진을 소개합니다. 금융조합은 제1차 한일협약(1904년)에 따라 재정고문으로 한국에 온 메가다(目賀田種太郞)의 금융기관 확충 정책에 의해 전국에 설립되었습니다 한말인 1907년(융희1)에 시작되어 1956년까지 있었습니다만 1956년 농업은행의 설립으로 해산되고 1959년 현 농업협동조합으로 재탄생하였습니다. 주로 일본인에 의해 창설 운영되었으며 한국인들이 주로 이용하는 금융조합의 조합장은 한국인이 맡았지만 실질적 총업무는 대부분 일본인이 맡았습니다. 32. 마산금융조합 1919년 2월 17일 도시금융조합으로 인가를 받아 같은 해 4월 1일 중앙동 1가 1번지에서 영업을 시작햇습니다. 신마산지역에서 주로 일본인들을 대상으로 영업을 했던 금융조합입니다. 아래 사진의 건물은.. 2013. 8. 26.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75) - 강점제3시기 오늘도 사진 석장 소개합니다. 29. 마산공립심상고등소학교 1904년 일본거류민회에 의해 발족된 학교로 현 월영초등학교의 전신입니다. 1936년 4월에 마산공립중학교(현 마산고)가 설립된 이후 고등과를 폐지하였습니다. 이 학교는 일본인 자녀들의 교육을 위해 개항 직후부터 일제 패망까지 운영된 마산 유일의 일본인 학교입니다. 30. 마산공립보통학교 1901년 4월 마산공립소학교라는 교명으로 개교한 마산공립보통학교는 현 성호초등학교의 전신입니다. 위 마산공립심상소학교가 일본인 자녀들을 위한 학교였다면 이 학교는 한국인들을 위한 학교였습니다. 31. 식산은행 마산지점 1918년에 지은 건물로 남성동 현 제일은행 자리에 있었던 건물입니다. 벽돌조 1층 양식으로 1970년대까지 남아있었습니다. 2013. 8. 19. 이전 1 ··· 12 13 14 15 16 17 18 ··· 22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