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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 도시이야기634

김형윤의 <마산야화> - 60. 해방 전의 전기 60. 해방 전의 전화 해방 전(소화 13년, 1938년) 부산 체신국 관할 중 경남 도내의 전화 가설 상황을 보면 부산을 필두로 하여 부·군·읍 소재지 25개처인데, 그 가운데 우리나라 사람들의 전화 소유자가 없는 곳이 두 곳이었다. 장승포와 진해읍이 그것이다. 진해는 일본 해군의 군항이며 일본인의 집단지이기도 하지만 조선인 거주촌인 경화동을 포함하여 전화대수 199대 중 경화동 주조주식회사가 전화번호에 나와 있는데 그것이 탁주양조장(조선인 경영?)이라 해도 전화는 개인 소유는 아니엇을 것이며, 읍내에 화월(華月)이란 중국요리점을 빼면 진해읍의 전화는 일본인 일색이었다. 그 당시의 전화에 관한 각종 요금을 오늘날의 그것과 비교해 보면 참으로 격세의 감이 불무(不無)하다. 1. 국내 통화료 통화선 해방 .. 2015. 12. 7.
김형윤의 <마산야화> - 59. 마산의 전기약사 59. 마산의 전기약사(電氣略史) ※ 『마산야화』 원문의 ‘한일와사전기주식회사’는 ‘일한와사전기주식회사’를 오기한 것입니다. 따라서 여기서는 원문을 고쳐 ‘일한와사’로 적습니다. 1898년(광무 2) 1월 18일 한성전기주식회사가 미국인 골부란에 의하여 수도 한성에 창설되고 1904년 7월 18일 이를 한미전기주식회사로 개칭, 1908년 7월 30일 일본인 삽택영일(澁澤榮一)에 의하여 일한와전주식회사가 창설되더니 다음해 1909년 6월 24일에 한미전기를 일한와전이 매수하고 이어 명칭을 일한와사전기주식회사(日韓瓦斯電氣株式會社)로 변경하였다. 마산에 전기회사의 지점이 설치된 것은 와전(瓦電)의 지점 개설이 그 효시인데 금일까지의 경과를 간추려 보면 대략 다음과 같다. 1911년(명치 44) 3월 16일 일.. 2015. 11. 30.
김형윤의 <마산야화> - 58. 역대 마산부윤 58. 역대 마산부윤(歷代 馬山府尹) 마산포는 요새지로서 일로(日露) 양국의 각축지로 각광을 나타낸 유명한 곳이다. 일본은 재빠르게 선수를 뻗쳐 신마산 현 월영국민학교로부터 서편에 걸쳐 99개년 즉 1세기의 조차조약(租借條約)을 체결함으로써 그들의 거류민을 보호한다는 구실로 영사(초대 三浦, 현 중화소학교), 헌병분견대, 경찰, 세관 등 중요기관을 설치하고 학교조합을 만들어 소학교를 설립하였다. 이 때에 한인들은 신마산을 조계(租界) 혹은 거러지(거류지)로 천칭하였다. 1899년(원문에는 1905년) 5월 1일에 소위 개항이라고 저희들 멋대로 개장하였던 것이다. 영사제(領事制)는 1907년 경에 이사로 하여 현 창원군청에 이사청을 구미식(歐美式)으로 건축하고 초대 이사에 삼증구미길(三增久米吉)이 취임하였.. 2015. 11. 23.
김형윤의 <마산야화> - 57. 치과의 57. 치과의(齒科醫) 마산에 치과의가 어느 때 들어왔는지 알 길이 없으나 일본인으로서 신마산에 총포화약상 겸 광산업을 하던 여창(與倉) 모(某)라는 자와 구마산에 고목(高木) 모(某)라는 자가 있었다. 이들은 정규의 치의(齒醫)가 아니라 일본인 당국자의 묵인 아래 버젓이 한글로 ‘병든 니(齒) 빼고 곤치고 새로 해 방은 병원이요’라는 말목을 문 앞에 세워 놓고 성업(?)을 했지만 사실인즉 그들은 구강위생에 대해서는 문외한인 단순한 입치업자(入齒業者)에 불과해서 전문의가 없었던 때라 충치, 풍치 등의 발취(拔取) 정도도 일반 개업의들에게 의존하곤 했다. 그들 외에도 가짜들이 횡행하던 무렵, 조선인으로서 일본 동경에서 오랜 수업을 닦고 정규의 절차를 거쳐 온 최초의 치과의사로서 등장한 사람이 약관의 고상목.. 2015. 11. 16.
김형윤의 <마산야화> - 56, 의료기관 56. 의료기관 마산에 최초로 병원을 설치한 것은 1908, 9년 경 구마산 박석고개(남성동) 전 동인(同仁)병원 왼편에 일본인 판전(坂田)이란 사람이다. 원장은 그 때로 상당히 연로하였다. 다음으로 구마산 시장 입구 현재 산업경제신문 지국 아래층 자리에 홍생(弘生)병원이 개업되었다. 1909년 경에 현재 마산상공회의소 건너편 협신중화공사(協信重貨公司) 사무소에서 농업협동조합까지 광역(廣域)에 걸쳐 종합병원-마산병원이 개원되었는데 원장에 구주제대(九州帝大) 출신 덕영오일(德永吾一)이며 산과(産科), 안과, 외과, 내과, 소아과 등 그 당시에도 병원 구실을 하였다. 지금은 없어졌으나 전 제길윤(諸吉允) 내과의원 이전에 일인 대강(大岡)병원 그리고 대강(大岡)이 사망 후 수상(水上)이라는 사람이 경영하였다... 2015. 11. 9.
김형윤의 <마산야화> - 55, 두 의사의 순직 55. 두 의사의 순직 1943년 일본인 태평양 서전(序戰)에서 까불던 것과는 달리 아이러니컬한 패전 기색이 결정적으로 흘러가던 3월 18일-. 이날 오후 마산 중앙동에 있는 도립병원 격리병사에 누더기를 걸친 50 가까운 조선인 남자 진객(珍客)을 칼 찬 순사가 호송해 왔다. 남자는 행로에 쓰러져 있는 성명, 주소 미상인 거지요, 순사는 정복을 입은 마산서에 외근하는 판본친차(坂本親次, 36)라는 청년이다. 보고를 받은 삼구미일랑(森久彌一郞) 원장은 이 거지를 곧 장질부사 환자로 진단하고 즉각 격리 병사에 수용하면서 원장 자신은 주치의가 되고 무산애자(茂山愛子) 양(19)을 주임 간호원으로 임명했다. 수용되었던 행려병자는 날이 갈수록 회복이 빨라 만 27일 만인 4월 12일 퇴원했다. 그러나 주치의 삼구.. 2015. 11. 2.
김형윤의 <마산야화> - 53. 우편국, 54. 화장장 53. 우편국 명치 32년(1899년) 11월 26일 창원부 외서면 중성리(현 마산시 남성동 142 성남병원)에 그 당시 사정으로 부산우편국 마산출장소를 설치하고 우편과 일문(日文) 전보를 취급하다가 이것을 1902년 8월 1일 신마산 본정(本町) 서정목(西丁目)에 청사를 신축 낙성한 것을 시발로 구마산소(舊馬山所)와 완전 분리되었다가 마산국(馬山局)으로 승격했다.(1900년 4월 15일) 다시 1922년에 마산역 앞 일각(一角)으로 이전한 것이 현재의 사옥 그대로이다. 초대국장은 하합영길(河合英吉)인바 구역은 창원군 일부 구산면에서 내서면 봉암 등으로 시가지가 확장 됨에 따라서 창원군 3분의 1 범역(範域)을 미구(未久) 옹위될 가능도 없지 않을 만치 업무가 폭주하고 있었는데, 지금은 우편집배를 모두 .. 2015. 10. 26.
김형윤의 <마산야화> - 52. 돝섬의 전설 52. 돝섬의 전설 돝섬은 마산 앞바다에 떠 있는 조그마한 섬, 일명 월영도(月影島)라 부르기도 한다.(행정구역 상 월영동에 속해 있기 때문) 1910년경에는 인가가 불과 7,8호였으나 지금은 20여 호. 아동 10여 명의 초등학교 분교장이 있고, 주민은 대개 영세 어민으로 섬의 동남 비탈에 보리와 채소를 가꾸기도 한다. 멸치 어장막이 있어 신·구마산 어판장과의 사이에 배의 왕래가 잦고 여름 한 때는 낚시꾼들과 피서객들이 득실댄다. 섬의 형상은 서쪽에서 바라보면 오리(鴨)가 먹이를 구하는 것 같기도 하고 인도산 코브라가 염소(羊)를 삼킨 것과 흡사하다. 일본인들은 이 섬이 일본의 비파(琵琶)와 같다 하여 그 어음(語音)에 비겨 미화(美和)라 했으며 마산만의 공원지로 지정하고 매번 벚꽃 묘목을 심었으나 바.. 2015. 10. 19.
김형윤의 <마산야화> - 50. 금은 세공업 일람, 51. 장날과 골목 50. 금은(金銀) 세공업 일람 마산의 금은(金銀) 세공업소는 아득한 옛날은 알 수 없으나 지금으로부터 40여 년 전까지는 다음과 같다 개원상회(開元商會) = 김상노 정진환 김인규 영광당(永光堂) = 박태룡 단 박태룡을 제외한 4명은 타계하였음. 현재 시내에는 13개소가 있다. 51. 장날과 골목 마산포의 장날은 경남에서 유명했다. 장터를 두고 바다 건너 거제를 비롯하여 고성, 삼진, 함안 칠원, 의령, 창녕, 김해, 진해, 창원 등 원근의 백성들을 탄토(呑吐)하는 곳으로 굴지의 터전이지만 장날 또한 모여 든 백성들이 폭주하여 은진(殷賑)의 극을 이루었다. 장날이 되면 고정된 점포에서 물건들이 거래되는 것이 아니라 거개가 난전(노점)에서 동업자가 끼리끼리 모여 앉아 고객들을 부른다. 이들 상인들은 보부상.. 2015. 10. 12.
김형윤의 <마산야화> - 49. 공동우물 순역 49. 공동 우물 순역(巡歷) 마산은 옛날부터 산수가 좋아 술맛을 가로되 제호미(醍醐味, 우유를 정제하여 만든 고급음료)라는 정평이 있다. 이것은 오로지 양조장 경영주의 인격이라 할 수 있으며, 술을 빚는 杜氏(두씨 상용일어)의 심오한 기술이기도 하지만 근본을 따져보면 이 지방의 물에 달려 있다고 할 수 있다. 마산 전체를 감싸돌고 있는 두척산(일인이 명명한 무학산)의 청정한 지하수가 혹서(酷暑)에 한랭하고 심동(深冬)에 미온(微溫)하여 과연 이곳의 모든 서민(棲民)의 생활 주변이 이웃과 돈목(敦睦)하여 상호부조하는 정신이 구현되어 있다. 이 때문인지는 모르나 그 고을의 식수가 나쁘면 인심도 거칠다는 것은 즉 물이 나쁘면 모든 양조장, 간장, 된장 특히 술이 나쁘게 되는 것이며 술이 나쁘면 음주자의 주벽.. 2015. 10. 5.
김형윤의 <마산야화> - 48, 일류 요정들 48. 일류 요정들 국치병합 전만해도 요정이란 이름은 없고 오직 점잖은 측에서 한담이다 혹은 밀담을 하려면 소위 들어앉은 집이란 곳을 찾는다. 그런 곳은 거의 은군자(隱君子)나 노기(老妓)라는 중년층 여자가 손님을 영접하고 손님의 청에 의해서 기녀를 불러 주효(酒肴)를 벌이며 여기에 북, 장고, 가야금, 거문고 등이 따른다. 말하자면 매우 우아한 현상이다. 차차 세월이 흐르고 시대가 변함에 따라 화류의 격조가 저질로 흐르기 시작했다. 인육을 현금과 직접 거래하는 청루(靑樓)가 생기고, 게다가 격을 조금 올린 니마이모찌(이중이란 말인데 연회장 작부도 되고 매춘도 할 수 있다는 의미) 감찰제도도 있었다. 이것은 기녀의 자유 여하로 행할 수 있는 일이다. 그것이 권번이니 조합으로 일본 화류계 풍습이 반도 산하.. 2015. 9. 28.
김형윤의 <마산야화> - 46. 보천교, 47. 김차랑 문고 46. 보천교(普天敎) 중성동 내에 소재(번지 미상)한 2층 목조건물은 전대미문의 총각회 사건으로 한때 전국적 화재가 되었지만 총각회 변고로 집 주인은 어디로인가 가버려 얼굴을 볼 수 없었다. 몇 달 동안 비어있던 이 집에는 회색 도복에 행근을 찬 상투쟁이들이 날이 갈수록 삼삼오오로 몰려들기 시작하자 대체 이들 3,40명 되는 사람들이 어디서 무엇을 하는 사람들인가 하여 이런 차림의 사람들을 처음 보는 동네 어른 아니 할 것 없이 의아그럽고 기이하게도 여겨 구경꾼들이 뜰 안으로 붐비었다. 말하자면 장꾼보다 풍각쟁이가 많았다. 지식층은 대개 알고 있었지만 이것은 보천교 일명 태을교(太乙敎)라는 유사 종교의 교도들이다. 이 교의 요술에 걸려들면 깍가쟁이(삭발) 신사로 자처하던 자도 양모자발구식(養毛仔髮舊式).. 2015. 9. 21.
김형윤의 <마산야화> - 44. 마산의 풍물첩, 45. 국어상용의 가 44. 마산의 풍물첩(風物帖) 풍신제 정월 대보름이 논 깜박하는 사이에 지나가고 정월 그믐날 밤이 오면 내일은 영등제(靈登祭)-속언에 바람 올리는 날이라 하여 각 가정의 규수들은 깨끗한 그릇을 가지고 인근 공동샘에서 정화수와 사람 발에 밟히지 않은 황토를 치마폭에 싸가지고 와서 주방 선반, 붉은 베조각 앞에 촛불을 켜고 정화수와 황토를 얹어놓고 별도로 술과 음식을 베풀어 그 해 풍년을 비는 것을 말해서 풍신제라고 한다. 이들 처녀들이 정성 모아 길어오는 정화수에다 마을의 짓궂은 머슴애들이 불결한 손이나 픍을 길어서 순진한 처녀들을 울리는 경우도 간혹 있었다. 여기 이들 처녀애들이 길어오는 물은 은상이샘, 수통골샘, 통샘, 광대바위샘, 자산동샘, 그 외 깔방샘 등이었다. 단오절 오월 단오절은 시내 놀이터로.. 2015. 9. 14.
김형윤의 <마산야화> - 43. 방앗간 43. 방앗간 지금은 모든 것이 기계화하여 옛날에는 상상도 못하던 편리한 세상이 되었다. 옛날 우리 가정의 일상생활을 돌이켜 보면 하루 세 끼의 식생활 중에서도 주부들의 고통의 하나는 쌀과 보리를 찧는 일이었다. 절구통(石造, 木造)이 가정마다 있는 것은 아니므로 이웃집이 아니면 삯방앗간을 이용해야만 했다. 방앗간의 종류는 마산의 경우 전(前) 삼성의원 앞집에 쇠방앗간이 있었는데, 방아의 윗돌은 미끄럽고 대석(臺石)은 거친 요철(凹凸)형으로 깎아놓은 위에다가 보리 도는 벼를 깔아 놓은 원형의 절구 둘레를 소가 돌아가면서 찧게 되어 있었다. 다음은 남성동 천주교회 근처에 디딜방아(足踏式)가 있었는데, 중후한 목조로서 절굿대는 Y자형이며 천장에 달린 두 개의 줄을 잡고 두 사람이 밟도록 되어 있다. 또 완월.. 2015. 9. 7.
김형윤의 <마산야화> - 41. 투우대회 42. 신 각설이 타령 41. 투우(鬪牛)대회 마산 명물의 한 행사로서 매년 음력 정월 대보름이면, 북으로 근주석전(近珠石田, 봉화재)에서부터 남으로 남성동 주재소를 동서로 기준하여 색전(索戰)대회를 행했다고 한 것은 별도로 소개한 바 있거니와, 8월 추석 때에는 근교 농촌에서 몰아오는 목우(牧牛)를 대소비왜(大小肥矮)로 감정 신사에 따라 갑을병종으로 구분하였다. 광장에서 투우대회를 열어 대성황을 이루는 이것 역시 이곳의 전통적인 놀이가 되어온 것이다. 여기에 출전한 최강의 투우로써 아직까지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소는 속칭 손(孫) 감찰집 소와 정경팔 집 소, 그리고 김선집 집 소의 3强豪(강호). 이들의 실력과 교묘한 투기는 참으로 막상막하로 시간이 갈수록 전연 피로함도 후퇴함도 없이 때로는 일몰 관계로 무승부 판정이 되기.. 2015. 8. 31.
김형윤의 <마산야화> - 39. 미기 인기대회 40. 축산여담 39. 미기(美妓) 인기대회 1917년 초하(初夏) 지방신문 일문(日文) 남선일보사(南鮮日報社) 주최 재마산 현역 예기(藝妓) 인기투표 대회가 있었다. 물론 투표로 결정하는 것인데, 투표용지는 관제엽서에다 1매 1인으로 제한한바 그것은 당연한 절차요 상식이다. 처음 발표에는 신마산에 산재한 망월루, 탄월 등의 일본 예기들이 판을 쳤으나 1, 2일 뒤에는 구마산에 있는 모 권번 재적자인 배학희가 경쟁을 물리치고 단독 등장, 조선 예기의 후보자가 되었고 일인 예기 후보 3명도 도중에 낙오되어 구마산 대 신마산, 조선인 대 일본인으로 획연히 대립, 매일 신문 발표를 보면 막상막하, 보는 자로 하여금 가슴을 졸이게 한 것은 요사이의 선거운동과는 근본 유추가 현저하게 달라서 여기에도 민족적 흥분을 일게 하였던 것.. 2015. 8. 24.
김형윤의 <마산야화> - 37. 산왕대신, 38. 세 가지의 기형상 37. 산왕대신(山王大神) 구마산 추산동 공신당산(公神堂山) 산정직하(山頂直下)에는 거대한 고목이 있고 그 고목 밑에 산제당(山祭堂)이라는 조그마한 사당이 있다. 이 사당이 언제부터 생겼는지 연대는 확실치 않으나 약 2,3백년쯤 될 것이라고한 고로(古老)들 말이 기억된다. 이곳은 부녀자들이 장수식재(長壽息災)를 산신에게 제사하는 곳으로 무당들의 돈벌이에 가장 적지라고 했다. 대개 보면 제당(祭堂) 밑 조그마한 정화수 옆에서 제(祭)에 필요한 재료를 요리하는데, 솥은 흙으로 만든 지괴솥을 사용하며 제 올리기 전에 제 나이대로 대잎(竹葉)을 따서 제단 앞에 놓고는, 무당의 지시대로 몇 번이고 예배를 올림으로써 복을 받으며, 화를 면하게 된다는 것이다. 오랜 전통을 이어 왔던 것인데 뜻밖에도 수성동에 거주하는.. 2015. 8. 17.
김형윤의 <마산야화> - 36. 줄다리기 36. 줄다리기 정월 대보름날, 마산의 자랑일 수 있는 행사는 부산과 마산의 줄다리기(색전, 索戰)라고 손꼽을 수 있을 것이다. 부산은 줄다리기가 끝나기만 하면 으레 불상사를 야기시킴으로써 중간에 와서 당국이 중지 시켰으나 마산 같은 소도시로서는 그런 일이 시종 없었다. 줄다리기 시초는 동부 소년과 서부 소년들이 좁은 골목길에서 시작하여 구마산 우편국 앞길이 신작로로서는 그 위치가 줄다리기에 가장 적절한 곳이었으므로 규모가 큰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몇 해가 지난 뒤 바다가 매축되어 공지가 1만2천 평이나 되었으므로 이곳에서 여러 가지 체육행사가 벌어졌다. 제1차로 하목(夏目)이라는 일인 미곡 창고(현재 尙存, 지금은 없어짐)가 들어섰을 뿐 대중을 수용하는데 아무런 불편이 없는 곳이었다. 대규모의 색전장.. 2015. 8. 10.
김형윤의 <마산야화> - 34. 음료수, 35. 사기점의 약수 34. 음료수 음료수라고 하면 물론 인류가 상용하는 식수를 제외할 수 없지만, 여기에 특히 음료수라 칭함은 화학적으로 감미료를 가미해서 인체에 해가 없는 것을 말하는 것인데, 설탕에 주석산(酒石酸)과 소다 등을 배합해서 만드는 사이다를 제일 먼저 손꼽을 수 있다. 사이다가 일본에서 처음 나왔을 때는 히라노스이(平野水)라 했고, 이것과 전후해서 나온 것이 미깡스이(蜜柑水)와 라무네가 각광을 뽐냈다. 미깡스이는 밀감의 즙을 낸 것이며 지금은 믹서를 가진 가정에서도 간단하게 만들 수 있다. 그런데 라무네라는 것은 레이몬 혹은 레몬(梠檬)이라는 것을 일인들의 발음이 오전(誤傳)된 것인데 근자에는 그 종적이 없어졌다. 그런데 과거에는 일본서 박재(舶載)하거나 부산서 가져오다가 신마산 헌병분견대 이웃에 살던 일본인.. 2015. 8. 3.
김형윤의 <마산야화> - 33. 마산 명주 33. 명주(銘酒) 마산의 미각이라면 으레 술을 첫째로 꼽을 수 있다. 이 명주(銘酒)를 양조하는 두(杜) 씨의 비법도 비법이려니와 우선 마산의 물이 좋음을 들 수 있을 것이다. 흘러가는 냇물이나 공동정수까지 감로수하고 해도 과장은 아닐 듯하다. 마산근교의 감천리(甘泉里)에 세차게 흘러내리는 냇물로써 술을 빚어놓은 탁주 맛은 흡사 청량사이다 맛이다. 완월 폭포수 역시 수세가 거창해서 기관차에 그 물을 넣으면 오르막길도 능률을 올린다고 한다. 공동우물 중에도 광대바위 샘물(통칭 몽고정), 구 형무소 앞 통샘물 그리고 지금은 매몰된 성호초등학교 샘물은 1911년 조선총독부의 기술원들이 수질 검사를 한 결과 가장 우수하다고 발표한 일이 있다. 이 물은 형무소 재소자들의 음료수로서 상용(常用)하였고, 몽고정 물.. 2015. 7. 27.
김형윤의 <마산야화> - 32. 벚꽃 32. 벚꽃 마산의 자랑으로서 벚꽃을 뺄 수 없다. 더욱 밤의 벚꽃 말이다. 타지방의 벚꽃나무 위치를 살펴보건대, 대개가 내(川)를 끼지 않은 평지로서 진해가 그렇고, 서울 근교의 우이동 같은 곳도 그러하며, 창경원이나 진해 해군 통제부 영내의 벚꽃 터널도 또한 평지다. 이런 곳들에 비하면 마산은 신마산 경교교반(京橋橋畔)을 중심한 천변양안(川邊兩岸)에 즐비한 벚꽃나무와 장군천 양안(兩岸) 및 마산 신사 앞 급경사 진 표리삼도(表裏參道 /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지만 원문 그대로 옮긴다)의 벚꽃나무들은 4월 중순경이면 만개된다. 이 외에 마산 중포병대대 영내 전역과 마산 부청(창원군청, 지금의 경남대 평생교육원) 경내와 부윤관사(마산시립 보육원, 지금의 마산종합사회복지관) 주변 등에 하루밤 사이의 기온에 .. 2015. 7. 20.
김형윤의 <마산야화> - 31. 마산의 미각 31. 마산의 미각 지금은 경향 각지에서 ‘곰탕’이 없는 곳이 없다. 그러나 옛날엔 생활이 윤택한 가정에서만 끓여 먹을 수 있었다. 마산엔 구 삼성(三省)병원 뒤에 박복년이라는 이가 곰탕장수를 시작한 게 그 원조로 손꼽을 수 있다. 이 집의 곰탕은 유명했지만 곁들여 깍두기의 맛 또한 구미를 돋구었다. 이관용(瓘瑢) 박사가 이 집 곰탕과 깍두기 맛을 본 뒤로는 지방순회 강연으로 영남방면에 올 때면 백사(百事)를 젖혀놓고서라도 복년네 집 곰탕을 먹고 가야만 맘이 후련하다고 했다. 조선일보 재직 시에 점심시간만 되면 사원들은 마산 복년네집 곰탕의 예찬이 대단하였다고 한다. 이 복년네집 다음으로 현재 구외과(具外科) 자리에 김성일 유기점에서 그 집 부인 경련 여사의 곰탕과 비빔밥도 또한 호평이었다. 또 박병주 .. 2015. 7. 13.
김형윤의 <마산야화> - 29. 면·마포상들, 30- 마산인구의 추세 29. 면·마포상(綿·麻布商)들 마산 시내의 외래 면포와 마포 도·소매상들은 대부분이 현재의 부림동과 남성동에 집중해 있었는데 청국인 상점의 상호로는 원생호(源生號), 취성호(聚星號), 덕성호(德盛號), 서상호(瑞祥號), 동성호(東盛號) 등 다섯 개가 있었으며 일본인의 그것은 길전상점(吉田商店), 고직상점(谷直商店), 전중상점(田中商店) 등이고 한인으로서는 남사겸(南士兼), 이기일 등이 있었다. 한국 토산품인 저(苧 / 모시), 마포(麻布) 도매상으로는 이순길, 강창언 등이 손꼽을 만했다. 그 외는 군소 소매상들인데 거의 모두가 일상생활에서 뺄 수 없는 필수품들을 취급했다. 황화(荒貨) 즉 동래 자주(東萊 紫紬), 상주 자주(尙州 紫紬)는 국내에서 굴지의 염색물이며 그 외 한산세모시, 남해 모시, 북포(.. 2015. 7. 6.
김형윤의 <마산야화> - 27. 미잠수정 출몰, 28. 조언 단속법 27. 미잠수정(美潛水艇) 출몰 1941년 일본의 대미 선전포고를 며칠 앞둔 12월 모 일, 청진과 일본 쯔루카(敦賀) 사이의 정기 연락선 게히마루(氣比丸)가 청진 출항 얼마 후 로영(露領) 블라디보스톡에서 부설하였던 기뢰(機雷)에 접촉 침몰하여 승객 백수 십 명이 몰살되었다. 그런데 당시 일본은 소련과 불가침 조약을 맺고 있던 사이라 하여 한 마디 항의도 하지 않았으며 소련 역시 반구의 진사(陳謝)도 없이 이렁저렁 끝맺고 말았다. 이 배의 승객 중에 경도제대의 철학과 일본인 학생이 있었는데, 당시 대판 조일신문에 게재 소개된 그의 수기인 즉 ‘생과 사는 표리가 동일하다’는 내용인바, 배는 해저로 내려가는데도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종용(從容)히 최후를 마친 그의 유서였었다. 이 해상 사고 후 일본 철도성.. 2015. 6. 29.
김형윤의 <마산야화> - 25. 기독교인과 마산신사, 26. 도리이를 닮은 문 25. 기독교인과 마산 신사(神社) 일본인 추방무골(諏訪武骨)옹의 마산항지(馬山港誌)에 의하면 현 문화동의 높은 자리에 위치하였던 마산 신사는 1909년(원문에는 1910년으로 되어 있음 / 옮긴 이), 즉 명치 42년에 창건된 것이다. 정전(正殿)에는 천조(天祖) 천조대신(天照大神)을 모신 곳이며 경내 우측에는 도하대명신(稻荷大明神)을, 그 곁에 사당은 주호신(酒護神)을 모신 송미신사(松尾神社)를 건조하여 경신(敬神)관념을 숭양(崇養)해 왔는데 신관(神官)으로서 발령된 사람은 고등관 3등의 수자춘충(須子春忠)이었다. 아침 미명 때를 기하여 일본인 노소남녀가 앞을 다투어 박장(拍掌) 참배하는 것은 그들의 경신(敬神)하는 정신적 관례이지만 일인 아닌 조선인의 별의별 각설이와 풍각쟁이 같은 아유배(阿諛輩) .. 2015. 6. 22.
김형윤의 <마산야화> - 23. 203고지의 거포, 24. 돝섬의 위장 적기 23. 203고지의 거포(巨砲) 마산 신사(현 제일여중·고) 정문 앞 공지에 녹슨 대포 일문(一門)이 거치되어 있었는데 어찌된 일인지 해방된 몇해 안가서 포대와 동시에 흔적이 없다. 이 대포는 1904년에 발발한 일로(日露)전쟁시 일본 최고의 군벌인 대산(大山), 내목(乃木) 등 원수급에 의하여 일본 조병창에서 건조, 군함으로 여순항에 인양하여 격전장이던 203고지에서 공을 세운 것으로, 일본의 군사력을 과시하기 위하여 마산만 입구이며 중포병 대대 입구 까치나루(鵲津) 산정에 두었다가 1935년 대대장이던 굴구중좌(掘口中佐)가 마산부에 기증하였던 바, 부 당국은 이것을 전기 장소에 이전 거치함으로써 마산만을 일모(一眸)에 보고 일본의 군국주의 사상을 환기했던 것인데, 그대로 보존해 두어서 하등 해될 것도.. 2015. 6. 15.
김형윤의 <마산야화> - 21. 간판칠갑의 사무소, 22. 철도 이야기 21. 간판칠갑의 사무소 마산에 간판 많기로 이름난 점포는 신마산 함흥집 자리의 석견옥(石見屋)이라는 신약 도매상이었다. 간판을 보면 대학목약(大學目藥), 미안수(美顔水) 하루나, 대전위약(大田胃藥) 등을 비롯하여 장방형의 작은 간판이 20여 개나 되었는데, 제내과(諸內科) 자리 건너편 3층 건물로 신축 이전 후에는 없어졌고, 본래 점포에는 ‘고마야’라는 상호의 오복점(吳服店)이 들어 앉았다. 몇해 후에는 민의소 건너편에, 즉 지금의 중앙병원 자리에 노농동우회(勞農同友會)와 조선일보 지국이 자리잡고 난 뒤로는 대소 간판이 십 수개가 붙었는데 기억되는 명칭은 다음과 같다. 노농문고(서적 대부분이 ML당원 김형두의 장서), 무산자신문(日共의 佐野學 主宰), 민중신문(일본의 赤松克磨 주간), 혜성사진(彗星社進.. 2015. 6. 8.
김형윤의 <마산야화> - 19. 풀먹은 총순, 20. 쌍사슴표 성냥 19. 풀(糊) 먹은 총순(總巡) 마산 본주민으로 우리가 유시(幼時)부터 알기로는 총순(總巡)이라 칭하는 사람이 두 분인데, 한 분은 한부성 친부(親父)인 한총순과 정성호 친부(親父)인 정총순이다. 그런데 확실히 기억 안 되나 한성(서울) 경무국에서 출장 온 총순 한 분이 마산경무청(위치=현 구마산 오처탕 위의 공설시장) 청사(廳使 / 使童)에게 위장이 좋지 못하다 하여 밥을 먹을 수 없으니 미음을 끓여오라 하였다. 총순은 출발 차시간이 급박하였다. 명령을 받은 김응도(故)는 번개 같은 꾀가 났다. 그때는 다 엽전을 쓰던 때다. 엽전 두 푼(百푼이 일원)어치의 풀(糊-그때 풀은 쌀임)에다 설탕을 섞어서 끓여다 진상하였더니 총순 어른은 풀인 줄이야 알 턱 없이 신속하고 맛이 좋게 끓였다 하여 사환 김응도에.. 2015. 6. 1.
김형윤의 <마산야화> - 17. 요사한 유학생들, 18. 바산을 마산으로 17. 요사(夭死)한 유학생들 마산 학생으로서 청운의 대지(大志)를 품고 급(笈)을 지고 동양의 신문화 도시 동경에서 유학 중 제4기쯤 될까? 재학생으로 이역에서 요절한 학생은 황갑주 2남 황희찬이다. 황은 경응의숙(慶應義塾) 대학생으로 하기 방학 때면 유학생 야구단의 1루수로서 활약한 바 있었는데 악성면정(惡性面疔)을 소홀히 했기 때문에 사망한 것을 필두로, 명치대학 전문부 법과생 옥용환은 급성 맹장염으로 역시 동경 우거(寓居)에서 사망, 경응의숙대학의 김창재, 산구고상(山口高商)의 강우정, 그리고 중앙대학 법과의 구연혁은 식중독으로, 조도전(早稻田)대학 특대생 이상수는 장질부사로 사망하여 한때는 동경 유학을 주저하기도 하였으나 이들은 모두 수재들로서 국가 장래를 촉망하였으나 지금 생각하면 애석하기 이.. 2015. 5. 25.
김형윤의 <마산야화> - 16. 공중욕탕 16. 공중욕탕 60여년 전 인구 2만을 넘지 못했을 때 신·구마산의 공중 욕탕을 손꼽으면 신마산 일인촌에 불로탕(不老湯), 앵탕(櫻湯), 구마산에 상반탕(常盤湯), 명호탕(鳴戶湯), 오동동에 조선인이 경영하던 곳이 고작이었다. 40여 년 전에는(구마산의 3개 탕은 폐업) 오처탕(吾妻湯), 오동동 입구 오동탕(午東湯) 그리고 현재 청락탕 자리(마분'馬糞'저장소)에 웅천 사람이 탕업을 차린 조일탕, 남성동 매립지에 소금탕, 현 철도 PX 이웃에 일인이 경영하던 곳과 철도 합숙과 기관구에 직원용의 큰 욕탕은 현재도 있다. 공동탕의 입욕료는 대인 5전, 소아는 3전에서 1전 5리까지며 월정을 하고 매일하는 사람은 1월 5전으로 4, 5전의 덕을 보게 되며 이웃 사람에게는 온정을 베풀어 무료 제공인바, 이것은 .. 2015. 5. 18.